‘라 마르 아트앤북스’ 심예슬 대표, 정해진 길보다 스스로 선택한 삶을 따르며, 자유롭게 자신만의 속도로 걷는 사람이다.
물치항 바닷가를 따라 걷다 보면, 야생화 향기와 함께 눈에 들어오는 작은 서점 하나가 있다. ‘라 마르 아트앤북스’다. ‘책’이라는 간판 아래 햇살 비치는 유리문 너머로 사람들의 그림자가 아른거리고, 문을 열면 책 냄새가 향기처럼 코끝을 스친다. 그 향기를 닮은 따뜻한 미소로 손님을 맞이하는 심예슬 대표(28)를 만났다.
“도전하는 걸 좋아해요. 일단 해보자는 마음이 늘 먼저 앞서요.”
양양에서의 삶도 그렇게 시작됐다.
‘진짜 가고 싶은 길’에서 만난 양양
심 대표는 김포에서 나고 자랐다. 대학을 다녔고 졸업도 했다. 누구나 그렇듯, 그는 갈림길에 섰다. 취업이라는 정해진 길과 진짜 가고 싶은 길 사이에서 고민했다. 결국 그는 ‘자유롭게 뜻을 펼치는 삶’을 택했고, 답답한 도시를 떠났다.
대학 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던 그는 2020년 여름, ‘제주도 한 달 살이’를 시작으로 섬에 머물며 환경단체 활동을 이어갔다. 당시 그는 2020년 4월 결성한 쓰리포먼데이(3학년 4반이 매주 월요일마다 쓰레기를 줍는다는 의미)의 취지를 그대로 이어받아 꾸준히 플로깅 활동을 실천했다.
하지만 섬에서의 생활이 3개월쯤 지났을 무렵, 알 수 없는 고립감이 밀려왔다. 육지로 자유롭게 이동하기 어려운 제주도의 특성도 외로움을 더했다. 그 무렵, 설악산국립공원 측으로부터 연락을 받았고, 그는 그린포인트제도 홍보 콘텐츠 제작을 위해 산에서 플로깅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처음 양양 땅을 밟았다. 당시 함께 설악산 플로깅 봉사자로 참여했던 아동 바우처 기관 대표를 만나게 되었고, 그를 통해 양양에 대한 좋은 인상을 받았다.
이후 제주도로 돌아가 공방 운영을 준비하며 매물을 알아보던 중, 설악산에서 만났던 바우처 기관 대표로부터 일자리 제안을 받았다. 그는 별다른 고민 없이 양양으로의 이주를 결정했다.
“제안을 받고 왔는데, 양양이 너무 좋았어요. 꼭 제주도만 고집할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했죠.”
2020년 11월, 그렇게 무작정 첫발을 디딘 양양에서 그는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넘어, ‘지속 가능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꿈꾸게 되었다.
‘낯선 땅’에서 살아남기
낯선 땅 양양에서 심 대표는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아동바우처기관의 미술강사로 일하며 지역과 인연을 맺었다. 심 대표는 강원일자리재단의 청년과 중소기업을 잇는 취업제도를 통해 지역 정착의 기반을 다졌다.
2023년 2월, 그는 실크스크린(스퀴지를 밀어 인쇄하는 공판화 기법)을 본격적으로 강의하기 위해 ‘라 마르 아트스튜디오’를 창업했다. 실크스크린을 매개로 한 공방 운영은 의미 있었지만, 콘텐츠 소모가 빠르고 출강 위주의 활동은 지속 가능성에 한계를 드러냈다. 마침 공방 계약 종료 시점이 다가오면서 공간 이전을 고민하던 그는, 자연스럽게 다음 방향을 모색하게 됐다.
그 무렵, 마음 한켠에 품고 있던 글쓰기에 대한 갈망이 다시 피어올랐다. 오랜 시간 여행을 다니며 여행일기를 꾸준히 써온 경험이 바탕이 되어, 2023년 9월 글쓰기 모임 ‘헤밍웨이클럽’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모임은 곧 사람들과 함께 글쓰기의 즐거움을 나누는 자발적인 창작 공동체로 자리잡았고, 심 대표는 운영자로서 글쓰기의 매력을 널리 알리는 데 성공했다.
같은 해 12월, 그는 또 다른 방식의 공감 활동을 시작했다. 겨우내 새로운 취미생활로 뜨개질이 하고 싶어진 그는 속초에서 활동 중인 ‘모래알’의 ‘주경야뜨’(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뜨개질하는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고, 단순한 취미로 시작한 이 모임은 어느새 이야기를 나누는 따뜻한 공감의 장이 되었다. 이 시기를 지나며 그는 정착 과정에서 종종 느꼈던 고립감도 자연스럽게 해소해 나갔다.
2025년, 공간을 새롭게 이전하며 그는 공방의 상호명을 ‘라 마르 아트앤북스’로 변경했다. 독립서점과 예술을 겸하는 복합 문화공간으로 확장한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심 대표에게 기자가 물었다.
“여러 활동을 하면서 삶의 균형은 어떻게 맞추시나요?”
그는 웃으며 답했다.
“몸을 움직이는 일이 큰 도움이 돼요. 주짓수를 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일기를 써요. 몸이 지치면 머리는 오히려 쉬게 되더라고요.”
한적한 물치 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라 마르 아트앤북스’ 독립서점 모습, 심예슬 대표가 산티아고 순례길과 헤밍웨이가 머물렀던 스페인 북부에서 작가의 여정을 따라 걸으며 받은 영감은, 오늘날 독립서점을 창업하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문화도시를 꿈꾸는 독립서점 ‘라 마르’
2023년 무렵 양양은 젊은 층 사이에서 ‘유흥의 도시’로 인식되곤 했다. 심 대표는 자신이 살아가는 도시 전체가 부정적인 이미지로 매도되는 현실에 반감을 느꼈고, 그때부터 양양을 문화예술 도시로 기억되게 하고 싶다는 바람을 품게 됐다. 평생교육관의 문화 프로그램도 좋았지만, 더 본질적이고 차별화된 공간을 고민한 끝에 도달한 결론이 바로 독립서점이었다.
‘라 마르 아트앤북스’라는 이름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심 대표에게 들어봤다.
“어느 날 카페에서 읽던 소설 <노인과 바다>에 이런 문장이 있었죠. ‘노인은 바다를 항상 라 마르(la mar)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바다가 사랑스러울 때 그렇게 불렀다.’ 문장을 읽고 난 뒤 서점 이름을 ‘라 마르’라고 짓게 됐어요.”
‘라 마르’는 스페인어로 ‘사랑스러운 바다’를 의미한다. 바닷가에 위치한 서점과 잘 어울리는 이름을 찾은 셈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좋아하는 심 대표는 작가가 머물렀던 스페인의 도시들을 여행하고 산티아고 순례길도 걸으며 스페인 특유의 감성과 리듬에 매료됐다. 그런 경험이 ‘라 마르’라는 이름과 자연스럽게 연결됐다. 손님들은 이름을 줄여 친근하게 ‘라마’라고 부르기도 한다며 그는 웃었다.
시니어 아티스트 어르신들의 감성을 담아낸 윷놀이 키트. 양양군농촌활성화지원센터와 협력해 프로젝트를 꾸준히 이어가며, 물치에 문화예술의 꽃이 피어날 수 있도록 밑돌을 놓고 있다.
‘지역민의 이야기’를 담아 출판까지
심 대표는 독립서점 ‘라 마르’가 관광객보다 지역민을 위한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도시 사람들을 위한 콘텐츠는 많지만, 현지인이 마음 놓고 이야기하거나 머물 공간은 의외로 없어요.”
그는 실제로 지역민을 위한 프로그램 기획에 집중하고 있다. 최근에는 강원문화재단의 ‘디딤돌 문화예술학교’사업에 선정돼 지역민을 위한 예술교육 수업도 진행할 예정이다.
심 대표는 ‘라 마르’에서 지역 청년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직접 책을 펴낼 수 있도록 하나씩 준비해가고 있다. 실제로 의미 있는 진전도 있었다. 2024년 양양문화재단의 생활예술지원사업에 선정돼 ‘아무튼 양양’이라는 책을 직접 펴내고 관객참여형 전시회까지 열었다. 이 책에는 양양에 정착한 이들의 애환과 일상이 담겼고, 양양군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기획부터 집필, 출판까지 전 과정을 경험한 그는 지역 작가 발굴을 위한 실질적인 기초를 차근차근 다져가고 있다.
지나가는 길이 아닌 ‘머무는 곳’으로
심 대표의 최종적인 꿈은 물치 해변 일대를 문화예술거리로 조성하는 것이다.
“지나는 곳이 아니라 머무는 곳, 사람들의 개성과 이야기가 묻어나는 곳이 되었으면 해요.”
지역 예술가들이 함께 작업하고, 마을 축제를 열며 로컬의 맛과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곳. 그는 그런 예술 생태계가 물치에서 가능하리라고 믿는다.
최근에는 양양군농촌활성화지원센터와 연합해 물치 어르신들의 감성이 듬뿍 담긴 윷놀이 세트를 제작하는 ‘시니어 아티스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지역주민과 호흡하는 프로젝트를 지속적으로 열며 물치를 문화예술거리로 조성하기 위해 밑돌을 놓고 있으며, 올해도 작년에 이어 프로젝트를 진행할 예정이다.
“즐거움이 저의 원동력이에요. 재미있으면 일단 해보는 거죠. 살다 보니 살아지고, 그게 또 누군가에게 닿는다면 더 좋잖아요?” 조용한 바닷가 마을에 자리한 ‘라 마르 아트앤북스’는 단순한 서점이 아니다. 한 사람의 삶에 대한 고민과 숨결이, 한 지역의 향기가, 그리고 여럿의 고독과 연결된 이야기들이 포개지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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