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지역 최대 간첩단사건으로 손꼽히는 ‘1969년 동해안지구 고정간첩단사건’이 보안대의 불법 수사로 만들어진 간첩조작사건임이 밝혀졌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이 사건에 대해 지난 3월 18일 진실규명을 결정하고, 3월 26일 사건 조사보고서와 진실결정문을 신청자들에게 보내왔다.
진실규명 신청자는 피해자 유족 4명으로 3명은 속초에, 1명은 포항에 거주하고 있다. 진실화해위는 2022년 7월 5일 이○근, 고○길 유족의 신청을, 2023년 10월 17일 김○섭, 백○래 유족의 신청을 조사 개시하기로 결정하고 그동안 조사를 진행해 왔다.
진실화해위는 이 사건 신청자들의 진술과 관련자료 조사를 통해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보안대의 불법 체포 및 불법구금 여부 △가혹행위 및 허위자백 강요 등 수사과정에서 불법행위 여부 △형사처벌 이후 인권침해 여부를 집중 조사해 규명했다. 진실화해위는 신청인 4명에게 피해진술을 조사받고, 국가기록원과 국군방첩사령부, 경찰청, 국가정보원, 국방부로부터 자료를 받아 조사를 진행했다. 아울러 피해자 김○건, 유○훈, 이○범의 유족을 찾아 참고인 진술조사를 진행했다.
동해안지구 고정간첩단 사건 개요
피해자 이○근은 흥덕호 선장으로 선원 김○섭 등과 동해상에서 조업 중 1964년 12월 5일 북한 경비정에 의해 납북되었다가 그해 12월 7일 거진항으로 귀환했다. 이 씨는 다음해인 1965년 11월 30일 행영호 선장으로 선원 고○길, 백○래 등과 동해상에서 조업 중 다시 납북되었다가 다음해인 1966년 2월 7일 거진항으로 귀환했다.
3년 후인 1969년 2월 13일경 이 씨는 103보안부대에 의해 속초에서 체포되었다. 1차 흥덕호 납북 때 받은 북한의 지령에 따라 다시 행영호를 타고 월북해 김○○ 등을 북에 남겨두고 추가 지령을 받아 다시 국내에 침투해서 추가 월북 등을 계획한 혐의였다.
1969년 2월 14일 이 씨와 함께 납북귀환한 흥덕호 선원 김○섭, 행영호 선원 고○길, 백○래도 북의 지령을 받고 지하당 조직 등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어서 이○구 등 6명도 속초와 명주, 삼척, 춘천 등지에서 체포되어 보안대 및 중앙정보부 춘천분실에서 합동조사를 받았다.
1969년 2월 25일 육군보안사령부는 ‘동해안지구 고정간첩단’으로 본 사건을 이름 짓고, 피의자의 실명, 사진, 나이, 주소지 등을 포함해 언론에 수사사항을 상세히 발표했다. 기자회견 후 보안대는 1969년 3월 10일 유○훈 등 6명을 지하당 조직원이라며 불고지 등의 혐의로 체포해 합동조사를 진행했다.
보안대는 8명을 구속하고, 그해 2월 22일과 3월 11일 두 차례에 걸쳐 중앙정보부 춘천분실 명의로 16명 전원을 반공법 위반 등으로 속초지청에 송치했다. 재판 과정에서 불출석 등을 이유로 최○군이 추가로 구속되었다.
춘천지법 강릉지원은 1969년 7월 22일 피해자 16명 중 14명에 대해 반공법,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실형을 선고했다. 이○근, 김○섭은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 이○구는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 고○길·김○건은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 이○만·최○군은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 유○훈은 징역 1년 6월 자격정지 1년 6월의 형을 선고받았다. 유○락 등 6명은 불고지죄로 징역 1년 6월~1년, 집행유예 3년~2년, 자격정지 1년 6월~1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백○래와 민○만 2명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피해자 8명과 검사의 항소는 서울고법에서 기각되었고, 다시 이○근 등 5명의 상고가 대법원에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첩보대 역용공작을 간첩사건으로 조작
진실화해위 조사 결과, 육군보안사령부가 간첩사건으로 발표한 1965년 11월 행영호 납북귀환사건은 첩보대 AIU의 대북 역용공작사업이며, 이 사건으로 각각 15년, 7년을 선고받은 이○근과 이○구는 간첩이 아니라 우리나라 첩보부대 공작원이었음이 확인되었다. 흔히 HID로 알려진 육군첩보부대는 1961년 7월경에 AIU로 명칭을 변경했다.
흥덕호 선장으로 납북되었다가 1964년 12월 17일 귀환한 이○근은 1965년 1월 25일경 육군첩보부대 AIU 소속 조종관 이○○에게 경찰 조사와는 별도로 북의 지령 내용을 진술하고 역용공작 가치를 인정받아 1965년 2월 12일 공작원으로 채용되었다. 그리고 이○구는 1965년 3월 26일 육군첩보부대에 공작원으로 채용되었다.
당시 첩보대가 작성한 세부공작계획서에 따르면, AIU는 이○구가 북으로 보낼 공작원으로 처남 김○○을 포섭하여 행영호에 탑승시키고, 선장 이○근은 어로작업을 빌미로 납북되어 김 씨를 북한 중앙당 연락부에 침투시키는 ‘11R-9공작’을 계획하였다. 실제로 이○근은 행영호 선장으로 1965년 11월 27일 출항해 어로작업 중 납북되었으며, 김 씨를 북에 남겨둔 채 1966년 2월 7일 귀환하였다. 첩보대는 1967년 11월 30일 두 사람을 공작원에서 해고했다.
군 보안대는 1969년 간첩단 검거 2년 전에 이미 첩보대의 역용공작을 인지하고 수사를 진행했다. 1967년 6월 6일 제103보안부대가 작성한 ‘간첩 용의자 잠재 소재 확인 보고’에서는 첩보대의 역용공작으로 행영호가 납북귀환한 사실을 언급하면서 “해당 첩보대의 공작계획 상의 기한이 도과하였음에도 김○○이 돌아오지 않아 이들 모두 첩보원에서 해고된 상황으로 해당 첩보대가 타 부대가 사안을 인지한 것을 이미 알고 있어 용의자들을 도피시킬 우려가 있으니 본부 차원에서 대응해야 한다”는 취지로 의견을 개진했다.
이에 군 보안대는 수사를 진행해 다음해인 1968년 2월 8일 행영호 납북귀환사건은 첩보대의 공작 사항이라는 ‘수사결과보고’를 내놓았다. 군 보안대는 “이○근의 경우 가치가 높지 않은 점조직 간첩으로 판단되나, 1차 납북 당시 지령을 받지 않을 수 없는 불가피한 환경이었고, 귀환 후 수사기관에 지령 내용을 자수하였으며, 2차 입북 및 김○○을 대동 입북시킨 이적행위 부분은 첩보대의 부득이한 공작 사항으로써 이미 형사처벌을 받은 사실을 고려하였다”라며, “대동 입북한 김○○이 조만간 남침할 가능성이 있고, 남침 시 이○근 및 이○구와 접선 가능성이 크기에 이들을 활용한 역용공작을 진행하기 위해 포섭 중에 있다”고 하였다.
보안대는 이들 AIU 공작원을 간첩으로 조작했을 뿐만 아니라, 법정에서도 재판부를 기만하는 허위증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1969년 7월 15일 강릉지원에서 열린 1심 6차 공판에서 이○근 등 변호인이 “이○근이가 첩보대의 첩보원으로 이북에 갔다 온 사실을 알고 있는가요”라고 묻자, 보안대 담당수사관은 “첩보대에 의하여 이북에 갔다 온 것이 아닙니다”라고 부정했다. 재차 변호사가 “아군 첩보대에서 교육이나 지령 또는 지시 등을 받고 월북하지 아니하였는가요”라고 묻자, 그는 “그러한 사실이 없습니다.…”라고 증언했다. 이 증언은 행영호 납북귀환이 첩보대의 역용공작으로 이뤄졌다는 보안대의 문서 내용과는 상반되는 내용으로, 이○근을 간첩으로 조작하기 위해 꾸며낸 허위증언이다.
보안대 불법 연행과 불법 수사
진실화해위는 조사 결과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보안대가 피해자들을 영장 없이 체포, 구금한 것으로 판단하고, 이는 형법 제124조의 불법체포, 불법감금죄에 해당하고 형사소송법에 따라 재심사유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특히 진실화해위는 이들 피해자들이 구속영장이 정식으로 발부, 집행되기 전에 이미 불법으로 구금되어 불법적인 수사를 받았다고 판단했다.
진실화해위는 보안대 문서와 수사기록 등을 검토해 이○근과 이○구는 최소 9일간, 김○섭, 고○길, 백○래는 최소 4일간, 이○만은 9일, 김○건은 11일간 영장없이 구금된 상태에서 수사받은 것으로 판단했다.
진실화해위는 1969년 2월 25일 육군보안사령부가 이 사건에 대해 대대적으로 언론에 발표했는데, 이때까지도 정식으로 구속되지 않은 유○훈, 이○봉, 이○범, 김○자를 피검자 명단에 기재해 놓은 것을 볼 때, 이들이 적법한 근거 없이 상당한 기간 구금되었던 것으로 판단했다.
아울러 고○길과 백○래 피의자 신문조서는 처음에는 2월 18일자에 작성되었다가 다시 2월 15일로 수정되었다. 진실화해위는 구속영장 발부 및 집행일에 맞추어 신문조사 날짜를 임의로 수정한 것으로 판단했다.
보안대의 피해자 연행도 불법적으로 이뤄졌다. 진실화해위는 신청인 및 참고인들의 진술에 따르면 보안대는 피해자들을 연행할 때 동행 필요 사유나 혐의 등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잠깐이면 된다고 기망하거나 위협적인 상황을 연출했으며, 가족 등 연고자에게 구속통지도 제대로 하지 않는 등 불법행위를 저지른 정황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고○길의 아들 고○○은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추운 겨울날 어두운 새벽에 가족들이 다 같이 자고 있는데, 남자 몇 명이 갑자기 집에 찾아와 아버지를 깨워서 바로 끌고 갔으며, 당시에 어머니도 무슨 영문인지 잘 몰랐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백○래의 아들 백○○는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추운 겨울날 저녁 즈음에 집에서 식구들이 밥을 먹고 있는데 군용트럭이 집 앞에 멈춰서더니 젊은 사람 2명이 내려서 방안으로 들어와 식사 중이던 아버지의 양쪽 팔을 붙잡고 트럭에 싣고 갔다. 무슨 일인지는 이야기하지 않고 그냥 잠깐이면 된다고 했는데 …”라고 말했다. 김○건의 아들 김○○는 “아직 추운 어느날 이른 새벽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 2~3명이 갑자기 집에 찾아와서 가족이 한 방에 자고 있다가 많이 놀랐으며, 아버지에게 잠시 조사할 게 있으니 가자고 하였고,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잠깐이면 된다고 하니 문 닫고 애들하고 더 자고 있으라면서 잠자던 차림에 점퍼 같은 것 하나만 걸치고 그 사람들을 따라 나선 게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라고 말했다. 이○범의 아들 이○○은 “추운 날 어두운 새벽 취침 중이었는데 군인 3명 정도가 갑자기 집에 와서 군화를 신은 채 방 안까지 들어오더니 아버지에게 총을 들이대며 가자고 해서 가족 모두 자고 있다가 굉장히 놀라고 무서웠으며, 아버지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끌려갔다.”고 말했다. <다음호에 계속>
엄경선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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