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2월 보안사령부가 내놓은 간첩 검거 보도자료. 나중에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사람도 억울하게 간첩으로 사진과 이름이 언론에 게재되었다.
사건 주동자 김○섭은 납북되어 북에서 제수씨와 함께 찍은 사진을 갖고 귀환했다고 한다. 아들 김○송은 이런 부친의 실수가 간첩으로 내몰리는 결정적인 빌미가 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납북 당시 명태잡이 나갔다가 납북되어 북에서 제수씨랑 찍은 사진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걸 이야기하지 않고 감춘 게 큰 화근이었다. 사건을 조작하기에 딱 좋은 건수였다.
고○길도 납북되어 아버지의 제수씨인 장모를 만나서 같이 사진을 찍었지만, 귀환할 때는 겁이 나서 사진을 찢어 버렸다고 한다. 고○길은 포항 사람으로 우리랑 같이 피난을 나온 사촌누나 김○자와 결혼했다. 남편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옥살이를 하게 되자, 누나는 4살, 5살 되는 어린 자식 둘을 놔두고 쫓겨나 속초로 왔다. 너무 억울해 쇼크를 크게 받았고, 나중에는 각종 질병에 시달렸다. 남편 고○길은 몇 년 감옥살이 하고 나왔지만, 3년 후에 자살했다. 고○길씨가 출소 후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고문 자체가 그렇게 무섭다며, 고문 같은 건 평생에 한 번이라도 받으면 안된다고 말했다.
우리 가족과 친척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다 몰살당했다. 아버지 사건이 터졌을 때 우리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가족들이 다 충격을 받아서 정신이 없었다. 이 사건으로 우리 가족들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정보과 형사들이 늘 우리 가족을 따라다녔다. 친척들도 겁이 나서 모두 왕래를 끊었다. 아버지 사건이 터지고 2년 동안 심하게 감시를 당했다. 그리고 1980년에도 계속 사찰을 당했다.
조카들이 10여명 있는데, 공직생활 하는 애가 한 명도 없다. 취업시 신원조회를 하면 국가보안법 위반자 가족이라고 부적격자로 나왔다. 그래서 조카들은 국가기관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냥 노동을 했다. 할아버지 사건 때문에 조카 애들이 가고 싶은 직장을 못 가니, 그게 제일 무섭다.
지금 생각해도 아버지는 너무 억울하게 돌아가셨다. 우리 자식들 피해는 보상받지 못해도, 자식된 도리로 아버지의 억울한 누명만큼은 꼭 벗겨 드리고 싶다.
속초에 이 사건과 관련해 진실규명 신청서를 접수한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속초에 거주하는 백○기(61세)는 2022년 8월 진실화해위에 “부친 백○래가 간첩으로 몰렸다가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가혹한 구타와 고문에 간첩으로 낙인을 찍은 언론보도 등으로 피해자와 가족은 큰 고통을 받았다”며 진실규명신청서를 접수했다.
백○래는 1965년 12월 9일 이 사건 주동자 이○근 선장이 모는 행영호를 타고 조업에 나갔다가 납북되어 다음해인 1966년 2월 8일 묵호항으로 귀환했다. 1개월 만에 귀환한 백씨는 다른 귀환 선원과 함께 해군방첩대에서 납북 경위와 북한에서의 행적에 대해 조사를 받았으며, 수산업법, 반공법 위반 등으로 기소되어 처벌받았다.
그로부터 3년 후 백씨는 다시 1969년 간첩단사건에 연루되어 크게 고초를 겪었다. 백씨는 행영호를 타고 월북했다가 돌아와서 동창생을 포섭해 지하당 조직을 위해 암약했다고 구속되었다. 그러나 백씨는 1,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1심 재판부는 “피고인이 기소 혐의를 부인하고 있고, 유일한 증거로 검찰에서 시인한 자백이 있으나 이를 뒷받침할 다른 증거가 없기에 해당 자백은 증거로 인정할 수 없다”고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이미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구속된 사실이 신문과 방송, 심지어는 대한뉴스를 통해 전국에 알려지면서 백씨를 비롯해 가족들도 간첩 가족으로 낙인이 찍혀 심한 고통을 당했다. 아들 백○기씨는 당시의 피해상황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아버지는 1969년 2월 간첩으로 몰려 보안대에 끌려간 후 구타와 고문을 심하게 당했다고 말했다. 간첩행위를 한 것을 시인하라고 강요받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석방 후에도 후유증으로 심한 고통을 호소했다. 통증이 심해 노란 고무줄을 팔에 묶고 수시로 주사를 맞는 걸 내가 직접 봤다. 지금 생각하면 아편을 진통제로 맞은 것이 아닌가 싶다. 통증이 심해 술을 먹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본인이 힘드니 가족들을 많이 괴롭혔다. 특히 어머니가 많이 맞았다.
아버지가 간첩으로 내몰리는 바람에 나는 초등학교를 1년 늦게 입학해야만 했다. 이 사건으로 가정형편이 어려워져서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했다. 어머니가 과일을 머리에 이고는 사방으로 팔려 다니시느라 고생하신 덕분에 가족들이 간신히 먹고 살 수 있었다.
한번은 아버지가 바다에 조업을 나가서는 못보던 깃대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런데 동네사람들이 “빨갱이 새끼가 북괴와 내통한다”라고 아버지를 음해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는 하도 억울해서 충격으로 쓰러지셨다. 결국 3년간 앓다가 돌아가셨다.
백학래가 탔던 행영호의 이○근 선장은 1969년 보안사령부에 체포되어 검찰 조사와 재판 진술에서 1965년 행영호 납북귀환은 이승한 HID 공작계장의 대북역용공작 지시로 진행했다고 진술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방첩대 내부 문서도 확인된다.
행영호 납북귀환이 HID의 대북역용공작이 사실이라면, 국가 첩보기관인 HID는 행영호 선원 백○래와 고○길에게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두 사람은 HID의 비밀공작인 줄도 모른 채 북에 끌려갔다. 그로 인해 두 사람은 납북의 피해를 입었고, 돌아와서 또 혹독한 심문을 받고 기소되어 억울한 처벌까지 받았다. 몇 년 후에는 그 사건이 빌미가 되어 다시 간첩으로 내몰리는 일까지 겪었다. 고○길은 징역 5년을 선고받아 복역했고, 백○래는 다행히 무죄 선고를 받았다. 두 사람 모두 조사를 받을 때 심하게 고문을 받은 걸로 추정된다. HID가 위험한 대북역용공작에 두 사람을 몰래 동원하지 않았다면, 이런 참혹한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백○기는 “아버지로부터 행영호 선장 이○근이 출항하면서 자신에게 막걸리에 수면제를 타 먹여 재우고 배를 북으로 끌고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이같은 내용은 행영호 선장 이○근의 검찰 진술 기록에도 나온다. HID의 지시로 선원들이 북으로 납치되는 과정에서 반항하지 못하게 잠을 재워 북으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더구나 보안사령부는 두 사람이 HID 공작 피해자라는 걸 알고도 간첩으로 내몰았다. 1967년 6월 6일자로 103 방첩대장이 1001 방첩처장에게 보낸 ‘간첩 용의자 잠재 소재 확인 보고’에는 두 사람이 탄 행영호가 102 첩보대장의 지시에 의거해 피랍을 가장해 월선했다가 귀환했다고 나온다. 문서에서는 이○근과 함께 귀환한 행영호 선원 5명을 간첩 용의자로 거론했다. 백○래와 관련해 “당 관내에 거주하는 전기 백○래를 동행 간첩 지령 여부에 대하여 조사 결과 간첩 행위 사실 적발치 못하였으나”라고 기록되어 있다.
1969년 동해안고정간첩단사건 기소자 16명 중에 월남 실향민과 가족이 14명이며, 납북귀환어부가 4명, HID 첩보대원 출신이 2명이다. 피의자 모두가 북한 체제와 접촉이 있었거나 대북공작활동과 관련된 사람들이다. 월남 실향민들은 함경북도 길주·명천의 양도 섬 출신이다.
사건 판결문에는 김○섭을 비롯해 모두 8명이 월남 전에 북한의 노동당원으로 활동했다고 나온다. 검증이 불가능한 20년 전 북한에서의 행적이 명확하게 특정되었다는 점이 오히려 사건의 조작 가능성을 의심하게 한다. 즉 정보기관이 북한 출신이라는 실향민의 취약점을 악용해 간첩단사건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싶다.
김○섭(61세)은 항소이유서에서 “월남한 지 20여년이나 되는데 그동안 대한민국 녹을 먹으며 세 아들이 이미 국군에서 제대하고 네째 아들이 현재 군에 복무중인 사실만 보더라도 조국을 배반할 리가 없다”고 항변했다. 이○만(61세)은 항소이유서에서 “북괴의 정치를 마다하여 월남 후 20여년간을 자식까지 거느리고 사는 본 피고인이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게 된다면 자식들한테도 영향을 주게되니 정당하게 사실을 밝혀달라”고 항변했다. 최○군(60세)은 항소이유서에서 “아버지가 6.25때 이북에 진주한 국군을 도와주고 우익계열인 한청단장까지 지낸 분이며, 피고인의 전가족이 국군을 따라 월남한 이래 20년 동안이나 민주주의 정신을 이어받아 살아오고 있다”고 항변했다.
속초의 실향민 중에는 첩보부대의 대북침투공작에 동원된 이들이 적지 않다. 대북침투작전에는 북한 말을 쓰고, 지리에 밝은 북한 출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자진해서 입대해 활동한 이들도 많지만, 북한 출신이라는 이유로 떠밀려 동원된 이들도 적지 않다. 이들 중 상당수가 작전 수행 중에 생명을 잃었다.
납북어부들 중에서도 월남 실향민 출신이 더 큰 어려움을 겪었다. 납북된 어부들 중 북한 출신이라는 이유로 북에서 돌아오지 못한 미송환자가 많다. 또한 북에서 가족이나 친지를 만난 납북귀환어부는 북으로부터 간첩지령을 받아온 걸로 의심을 받았다.
월남 실향민들은 분단과 대립으로 힘든 시절을 겪어왔다. 1969년 동해안고정간첩단사건 진실규명은 속초 월남 실향민들의 명예와 자존이 걸린 문제이다. 대한민국이 어렵게 남한을 선택해 고향을 떠나온 실향민들을 다시 분단의 제물로 삼아 희생시킨 것은 아닌가. 이미 여러 증거와 정황이 사건 조작을 의심케 한다. 반드시 진실규명과 재심이 뒷따르기를 기대한다.<끝>
엄경선 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 설악신문(www.soraknews.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