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2월 25일 동해안지구 고정간첩단 사건을 발표하고 있는 초대 보안사령관 김재규 소장. 사진 출처 : 민주화운동 오픈아카이브, 경향신문사 제공.
1969년 2월 보안사령부가 발표한 동해안고정간첩단사건으로 속초와 인근 지역 주민 16명이 기소되어 2명을 제외한 14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중 7명이 간첩활동을 했다고 징역 4년~15년을 선고받았고, 7명이 간첩행위를 알고도 신고하지 않았다는 불고지죄로 징역형에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이 사건 1, 2심 판결문을 보면, 법원은 피의자들의 간첩활동을 뒷받침하는 물적 증거는 하나도 없이, 오직 피의자들의 진술에만 의존해 중형을 선고했다. 더구나 재판 과정에서 다수의 피의자가 고문으로 인한 허위자백을 주장했지만, 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서울고등법원의 판결문에는 실형을 선고받은 4명이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했다고 주장했다고 나온다. 김○섭(61세)은 항소이유로 “명태잡이를 하다가 납북되어 이북에 머무는 동안 지인이 찾아와 월남한 사람에게 가족들의 안부를 전해달라고 하기에 송환된 후 안부를 전하였을 뿐이며, 범행을 시인한 것 같이 되어 있는 것은 속초방첩대와 검찰에서 모진 고문에 못 이겨 허위진술을 한 것”이라고 했다. 이○만(61세)은 항소이유로 “속초육군방첩대에서 심한 고문을 하는 바람에 늙은 몸이 견디지 못하여 시인했다”고 했다. 김○건(53세)은 항소이유로 “고문에 못 이겨 허위자백한 것”이라고 했고, 유○훈(53세)은 항소이유로 “본인이 포섭당하여 북괴의 활동에 동조한 것처럼 기재된 것은 고문에 못 이겨 허위자백한 것”이라고 했다.
15년 중형을 선고받은 김○섭은 이 사건의 핵심인물로 본인뿐만 아니라 본인의 가족, 친척, 지인 10명이 사건에 연루되었다. 법원은 김○섭(당시 61세)이 조업 중에 납북되어 북에서 속초지구 노동당 지하당 조직책으로 임명받고는 지령을 수령했으며, 귀환한 후에 자수하지 않고 국가 변란을 목적으로 반국가단체를 구성해 다른 이들을 지하당 조직원으로 임명하는 등 간첩활동을 했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해 김○섭의 아들 김○송(78세, 속초 교동 거주)은 부친이 억울하게 간첩으로 내몰렸다며, 지난 2022년 9월 15일 부친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신청서를 접수했다. 김씨는 진실규명신청서에서 “1969년 2월 부친이 간첩으로 내몰릴 당시, 작은 형과 본인은 북파공작활동을 하는 HID 부대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며, “부친은 북한 지령을 받아 간첩 활동을 하고, 두 아들은 우리 정부를 위해 북한 침투공작을 벌이는 북파공작원 부대원이라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이냐”고 사건조작 의혹을 제기했다. 김씨는 “북한체제가 싫어서 월남한 부친과 가족, 고향사람들이 간첩행위를 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도 했다. 김씨가 부친 김○섭의 사건과 관련해 털어놓은 이야기를 정리했다.
아버지는 간첩사건에 휘말려 15년형을 받고 14년 3개월을 교도소에 수감되어 지냈다. 1980년대 중반 쯤, 아버지 출소를 얼마 앞두고 전주교도소에서 연락이 왔다. 맏형과 둘이서 교도소로 갔더니, 아버지는 식물인간이 되어 아예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 교도소에서 나와서 1년 정도 집에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사건이 있은 지 5~6년 후 사촌 매형 고○길(사촌 누나 김○자의 남편, 징역 5년 선고)이 형기를 마치고 석방되어 집에 찾아왔다. 매형은 사건 당시 아버지가 고문을 당한 이야기를 해줬다. 사건 당시 고○길, 김○자 부부가 보안사령부로 끌려갔는데, 사촌 누나 김○자가 다른 방에서 아버지 김○섭이 고문을 당해 고통스러워 고성을 지르는 소리를 직접 들었다고 전했다. 조사관들이 아버지한테서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자, 고문을 통해 강제로 자백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4형제이다. 사건이 터졌을 때 맏형은 속초 청학동에서 ‘우리이용소’를 하고 있었다. 2층집을 짓고 살았는데, 보안대에 끌려가 “아버지와 연결돼 공작금을 받아서 집을 짓지 않았느냐”고 추궁당하는 등 고초를 당했다. 형이 살던 집도 다른 사람에게 다 넘어가 버렸다. 둘째 형은 KBS 속초방송국에 다녔는데, 아버지 일로 퇴사조치를 당했다.
나와 셋째 형 김○연은 당시 HID부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HID부대에서 행정병으로 복무 중이었고, 형은 장기복무 중사로 HID부대에서 교관을 하고 있었다. 1969년 정보부에서 세 사람이 부대로 나를 찾아왔다. 아버지가 간첩 혐의가 있으니, 아는대로 이야기를 하라고 했다. 우리 자식들은 아는 게 없었다. 그 사람들이 백지 진술서를 하나 내밀고는 밑에다 사인을 하라고 해서 그냥 사인을 해줬다. 그때 나는 크게 당하지 않았지만, HID에 근무한 셋째 형은 서울 정보부에 끌려가 일주일 가량 조사를 받고 나왔다. 나중에 형은 나에게 그때 전기고문까지 받았다고 말해줬다.
이 사건으로 형은 옷을 벗었고, 나는 다른 일반 보병부대로 전출되었다. 형은 첩보원 출신이라 입이 무거워서인지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사건이 있고 나서 10여년 살다가 50대 중반에 돌아가셨다. 고문 때문에 몸이 많이 나빠져 죽을 때까지 고생했고, 사람 만나는 것을 꺼려했다.
당시 형은 북파공작과 관련해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HID에서 교관으로 있으면서 직접 북파공작활동에도 나섰다. 배에 공작원을 싣고 북으로 들어가 어느 지점까지 들어가면 그 다음에 노 젓는 목선배를 타고 침투해서 움직이는 식이었다.
나는 공안당국이 증거도 없이 진술만 가지고 조작해 간첩사건을 만들었다고 본다. 재판 과정에서 아버지가 두 아들을 통해 ‘북파공작 군사기밀’을 캐냈다는 이야기는 일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들이 HID에서 간첩을 교육시켜 북에 침투시키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진짜 간첩이었다면 당연히 관련 정보를 캐내려 하지 않았겠는가? 북에 붙잡혔다가 돌아온 아버지가 군대생활에 대해 물어보면, 우리도 아버지를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군대생활에 대해 일체 물어본 적이 없다. 재판과정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았다.
1964년에 납북됐다가 돌아온 아버지는 이발소 하는 맏형네 집에서 지내다가 강원도 고성군 문암 어촌마을에 들어가서 배를 탔다. 우리가 봤을 때 아버지는 그저 뱃사람이다. 새벽에 바다에 나가 그물을 놓고, 고기 잡으면 들어와서 또 어구 손질 작업을 하고, 다음날 새벽 4시면 다시 바다로 작업하러 가는 사람이었다. 만약 간첩을 하려면 좀 설득력도 있고, 많이 배우고 해야 되는데, 아버지는 그렇지 못했다. 그 옛날에 배를 타봐야 뭐 하겠는가. 육지에서 할 수 있는 직업은 아무것도 없어, 그냥 고기를 잡아 먹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누구를 포섭하고, 간첩행위를 하고. 막 이런 내용이 나오니, 우리도 이해가 안 갔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아버지는 함북 명천군 앞바다에 있는 양도가 고향이다. 한국전쟁 중 양도는 우리 해병대가 들어와 장악한 섬으로 해병대 1개 중대와 육해공 첩보부대가 들어와 주둔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군수물자나 실탄 등을 고지로 올려다 주는 일을 지원했다. 고향 집이 좀 컸는데, 부상병 10~20명을 집에 머물게 하여 치료를 받게 했다. 이렇게 국군에 협조했던 일 때문에 아버지는 1·4후퇴 전에 먼저 남으로 피난을 내려왔다.
아버지는 포항 쪽으로 먼저 피난을 내려왔고, 다시 1·4후퇴 때 국군과 함께 양도로 올라가서 식구와 친척들을 모두 배에 태우고 월남했다. 주문진으로 내려와 수용소 비슷한 곳에서 집단 생활을 했다. 이 때 친척들도 같이 내려왔다. 양도라는 섬은 청주 김씨 집성촌으로 한 30가구 정도 되는데. 4촌 5촌 친척이 다 거기에 모여 살았다. 성진에 또 일부 친척들이 있었는데, 1.4후퇴 때 같이 따라 나왔다.
1964년 12월 아버지는 이○근이 선장으로 있는 흥덕호를 타고 조업을 나갔다가 납북되었다. 흥덕호 선장 이○근과 아버지는 같은 고향 사람이다. 할아버지 때부터 가까이 지낸 사이로 피난 때도 같이 내려왔다. 아버지는 납북되어 북에서 제수씨를 만났다. 아버지 동생 김○천은 북에 부인을 두고 피난을 내려와서는 동해안에서 UN군 군수물자를 수송하다가 풍랑에 배가 전복되어 사망했다. 북한측은 아버지가 양도 출신이라는 걸 알고 수소문해서 북에 살고 있는 제수씨를 만나게 해줬다. 이때 아버지가 실수를 하셨다. 귀환해서 조사를 받을 때 북에서 가족을 만난 걸 다 털어놨어야 하는데, 겁이 나니까 미처 말을 하지 못했다.
납북되어 북에서 가족을 만난 걸 숨긴 게 결국 화근이 되었다. 귀환 후 4년쯤 지난 1969년 2월 보안사령부에서는 흥덕호 선장 이○근을 간첩 혐의자로 체포해 심문했다. 심문과정에 아버지가 납북되어 북에서 제수씨를 만났다는 이야기가 터져 나왔다. 공안당국이 이걸 빌미로 삼아 아버지가 납북되어 북에서 지령을 받아와서 간첩활동을 했다고 엮어 버린 것이다.
1968년과 1969년은 남북한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때였다. 공안당국은 납북되어 북한 사람과 접촉한 사람은 무조건 간첩 용의자로 주목했다. 그런데 납북어부 김○섭은 귀환 후 북에서 가족 친지를 만났다는 사실을 실토하지 않고 숨겼다고 했다. 북한과 관계된 일이라면, 작은 문제 하나도 무조건 크게 확대되던 시절이었다. 김○섭 자신도 북에서 가족을 만난 일이 4년 후 엄청난 사건으로 비화되리라고는 감히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계속>
엄경선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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