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으로 내몰린 이○근이 HID 첩보원으로 활동했다는 기록은 곳곳에 나온다. 1969년 2월 20일 육군보안사령부가 작성한 <간첩 검거 보고> 자료에는 이○근이 ‘1957년 AIU 첩자’라고 적혀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첩보부대인 HID는 한국전쟁 중인 1950년 7월부터 활동하다가 1961년에 육군첩보대 AIU로 이름이 바뀌었다. AIU 첩자는 곧 북파공작원인 HID 첩보원을 뜻한다.
이○근이 첩보부대원 신분으로 간첩 지령을 수행한 사실도 재판 문서기록에서 다수 확인된다. 1969년 6월 20일 육군 제9807부대가 춘천지방법원 강릉지원장 앞으로 보낸 ‘사실조사 의뢰 답신’ 문서에 “피고인 이○근 / 입대일 65.2.12. / 해고일 67.11.30. / 해고 당시 속초경찰서에 요시인으로 편입”이라고 적혀있다. 당시 육군 제9807부대가 어느 부대인지 잘 알 수 없지만, 속초에 있는 첩보부대로 추정된다. 이 사실조사의뢰 답신 문서는 군부대가 법원으로 보낸 공문서로 사실관계에 대한 신빙성이 높다.
진실화해위원회의 ‘흥덕호 납북귀환어부 인권침해 사건’ 진실결정문에 의하면, 이○근은 흥덕호 선장으로 납북되었다가 1964년 12월 17일 귀환해 조사를 받고, 1965년 1월 23일에 구속되었다. 9807군부대의 사실조회 회신대로라면, 이○근은 1차로 납북되었다가 돌아와 구속된 상태에서 첩보부대에 입대한 것이다. 그리고 이○근이 1967년 11월 30일에 해고되었다는 사실조회 회신을 감안하면, 이○근이 행영호 선장으로 1965년 11월 29일 두번째 납북되었다가 다음해인 1966년 2월 8일 귀환한 것도 이○근이 첩보원 복무 중에 일어난 일이다.
방첩대 보고문서에 이○근이 HID의 역용공작계획에 따라 간첩활동을 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내용도 실려 있다. 이○근을 간첩용의자로 체포하기 1년 8개월 전인 1967년 6월 5일 103방첩대장은 1001방첩처장에게 ‘간첩용의자 잠재 소재 확인 보고’라는 제목의 문서를 보냈다. 이 문서는 국가기록원에서 영구보존하는 이○근 사건 형사사건기록에 포함되어 있다. 이○근과 102첩보대와 관련해 일부 내용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 (이○근) 상기 본명은 어업에 종사하면서 60.4.20~61.10.5.까지 102첩보대 첩자(대북 공작원 호송침투)로 겸무 종사하던 자로서, … (1964년 12월 흥덕호 납부귀환 후) 102첩보대에서는 앞으로 대북 공작원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 102첩보대에서는 본명의 간첩 행위를 수사기관에 고발치 않고 방조 및 은폐해 두었기 때문에 본명은 간첩 상태범으로서 계속 어업에 종사하면서 유형 무형으로 간첩 행위를 감행하든 자로서 …
당시 102첩보대장 중령 김동석의 지시에 의거 65.11.26. 20:00경 해양호 선장(선원5명 포함)으로 가장하여 명목상 102첩보대 대북공작원인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1구 거주 김종옥 당 31년을 동태잡는 구경을 시켜준다는 구실로 유인 승선시켜 북괴 경비정에 피납을 가장, 중앙군사 분계선을 월선…김종옥은 북한에 계속 잔류시키는 동시, 본명 외 선원 5명만이 합법을 가장 귀환한 이중간첩 행위자이며 …
속초경찰서에서는 수산업법 위반으로 구속 조사하였으나 간첩행위 사실에 대하여 극구 부인하고, 102첩보대에서 배후 구명운동을 함으로써 속초경찰서에서나 강릉검찰지청에서 동사건을 미온적으로 처리되어 계속 간첩 행위를 암약 중에 있든 자이며 …
102첩보대에서 당대에서 수사 착수한 점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102첩보대에서 대원 현지 출장 이○근을 도피시킬 우려가 있으니 참고 바랍니다. …
해당문서에서 방첩대는 102첩보대장으로 김동석을 주목했지만, 36지구대장 김동석은 1961년에 전역해 1963년 10월부터 1년 가까이 속초시장을 역임하는 등 행정가로 활동했기에 1960년대 첩보부대 활동과는 관계가 없다. 그리고 1966년 두번째 납북될 때 이○근은 해양호가 아니라 행영호의 선장이다. 이같은 오류에도 불구하고 보고문서에는 간첩혐의자 이○근에 대해 상당히 중요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문서에서 103방첩대는 간첩혐의자 이○근을 이중간첩 행위자로 지목했다. 이 문서에는 분명히 1965년 11월 이○근의 두 번째 납북이 ‘102첩보대의 지시’에 의거해 이뤄졌다고 적혀 있다. 이○근이 결정적으로 간첩으로 몰린 이유가 바로 ‘2차 동반 납북사건’이다. 102첩보대가 대북역용공작 차원에서 이○근을 시켜 ‘2차 동반 납북사건’을 진행했다면, 이○근은 북한의 간첩이 아니라 남한의 대북 첩보원인 것이다.
이 문서에서는 1965년 2차 납북되어 미귀환한 김종옥, 이○근과 함께 김종옥 동반 월북을 추진해 징역 7년을 선고받은 이○구도 102첩보대의 첩보원이었다고 했다. 방첩대가 나서서 이○근을 체포하려고 하면, 102첩보대가 방해하며 피의자를 도피시킬 수도 있다고 거론했다. 간첩용의자 이○근을 102첩보대가 보호할 인물로 본 것이다.
방첩대가 1968년 보안사령부로 이름과 조직을 바꾸고, 다음해 2월 이○근을 간첩 혐의자로 체포했다. 문서내용과 같이 보안사령부는 이미 사전에 이○근이 103첩보대의 지시로 대북역용공작으로 간첩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간첩으로 체포한 것이다.
HID 첩보부대가 흥덕호 선장으로 1차 납북귀환한 이○근을 공작원으로 포섭하려고 시도한 정황은 진실화해위 보고서에도 나온다. 2023년 12월 19일 진실화해위원회는 이○근의 1차 납북귀환사건은 ‘흥덕호 납북귀환어부 인권침해사건(1964.12.17.귀환)’에 대해 진실규명을 결정했다. 진실화해위는 결정문에서 “흥덕호 선원들은 귀환 직후 수사기관으로부터 불법 구금 등 불법적인 수사를 받았다”며, “국가가 흥덕호 납북귀환어부와 그 유족들에게 사과하고, 실질적인 피해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진실결정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속초경찰서 정보계에서는 1차로 납북 귀환한 흥덕호 선장 이○근을 이용해 대북역용공작 계획을 세우고, 역용공작에 필요한 조치로 흥덕호 선원 전원에 대해 공소를 보류했다. 관련해서 속초경찰서 정보계 대공반 경사가 1965년 1월 7일 속초경찰서장에게 보고한 공작계획서가 진실화해위 진실결정문에 공개되었다. 이 공작 계획은 이후에 HID의 지시로 이○근이 2차로 납북되었다가 귀환한 사례와 아주 유사하다. 경찰은 이 공작 계획 문서에서 “이○근은 과거 HID출신으로 반공사상이 투철해 공작을 잘 수행할 자”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속초경찰서의 역용공작계획은 취소되었다. 1965년 1월 23일 속초경찰서는 이○근이 북한으로 받은 지령이 이미 다른 선원들에게 노출된 점, HID가 노골적으로 이○근을 방문해 포섭하려고 접견한 사실이 알려져 인근 주민들이 이씨를 공작원임을 알게 된 점 등을 이유로 역용공작을 취소하고 이○근을 구속했다고 강원경찰국장에게 보고했다.
다음은 진실화해위의 보고서에서 공개한 속초경찰서의 공작계획서 내용이다. 공작계획서에 나오는 ‘이○권’과 간첩으로 몰린 ‘이○근’은 동일인물이다.
▲ 공작계획서(1965.1.7. 속초경찰서)
1. 목적 : 북괴에서 지령받은 자를 역이용 월북귀환 공작함으로서 북괴 대남공작 방법을 탐지함.
2. 대상 : 이○권
3. 방법, 임무
1. 이○권에게 충분한 반공사상교육과 환경조성공작 (65.1.10~3.20)
2. 이○권으로 하여금 기히 내정한 공작원(미정)을 포섭케 하고 (65.3.20~4.10)
3. 이○권이 포섭한 자(공작원)로 하여금 내정한(미정) 인물을 3~5명의 포섭명단과 사진을 입수, 이○권에게 제공케 하고 (65.4.10~6.10)
4. 이○권으로 하여금 선주 선원을 포섭하여 (65.6.10~8.20)
5. 이○권이가 포섭한 명단을 재검토 (65.8.20~9.10)
6. 이○권을 입북시킨다 (65.9.20~25 어간)
7. 월북귀환 즉시 신고하여 대북첩보 입수한다.
(중간 생략)
8. 참고 : 이○권은 과거 HID출신으로 강담하고 반공사상이 투철함으로 본건 공작 능담완수할 풍부한 자력이 있는 자임
피의자 이○근은 사망한 HID 공작계장 이승한의 지시로 북한의 지령대로 활동했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 죽은 이승한의 부인 유○○는 재판에서 증인으로 출석해 피의자 이○근이 죽은 남편의 첩보원이라고 말했다. 유씨는 “죽은 남편이 이○근과 자주 만나 공작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부대에서 돈이 나오지 않을 때 이○근에게 본인이 돈을 준 일이 있다”, “이○근이 남편의 첩보원이었기 때문에 알고 있다”라고 진술했다.
해당 첩보부대는 분명 HID의 첩보원으로 대북역용공작에 동원된 이○근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대는 대북관계의 특수성 때문인지, 아니면 보안사령부의 위압에 밀려서인지 사건에 대해 침묵했다.
HID 첩보원으로 대북역용공작을 수행한 이○근을 보안사령부가 간첩으로 내몰았다면, 이는 경악할만한 국가 범죄행위이다. 국가가 민간인 납북피해어부를 대북역용공작에 동원한 것도 큰 범죄이다. 더구나 나라를 위해 일한 첩보원을 간첩으로 내몰고 파멸시킨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진실화해위의 조사작업을 통해 50여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사건의 진실이 제대로 밝혀져야만 한다. <다음호에 계속>
엄경선 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 설악신문(www.soraknews.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