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2월 25일 경향신문 3면에 실린 동해안고정간첩단 사건 기사. 김재규 보안사령관이 직접 사건에 대해 발표했다.
1969년 2월 25일 육군보안사령부가 발표한 동해안고정간첩단사건은 납북귀환어부가 연루된 최초의 공안사건이다. 이 사건에 속초를 비롯해 동해안 주민 15명이 한꺼번에 연루되었으며, 그중 주동자 2명은 징역 15년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남북한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1968년 9월 육군방첩부대가 육군보안사령부로 개편되고, 11월 울진삼척 무장공비사건이 터진 이후에 김재규 보안사령관이 이 간첩단사건을 직접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했다. 당시 피해자들은 간첩으로 내몰린 게 억울하다고 호소했으나, 남북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상황에서 열린 재판에서 피의자의 외침은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그리고 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건에 대한 여러 의혹은 해소되지 않았고 진실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지난 2020년 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하자, 사건 피해자 자녀 몇 명이 각각 나서서 부친들의 억울한 간첩 누명을 풀어달라는 내용으로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이에 2022년 7월 5일 열린 진실화해위 제36차 위원회에서 이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조사개시’를 결정했다. 현재 위원회는 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한 조사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2월 사건의 실체 파악에 도움이 될 일부 문서가 1964년 귀환한 흥덕호 납북귀환어부 인권침해사건 진실결정문에도 공개되었다.
속초 거주 피해자 가족 2명과의 인터뷰, 당시 재판 기록 자료,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결정 자료를 토대로 간첩단 사건 피해자의 피맺힌 외침을 담아 보았다.
이○근 간첩으로 몰려 15년 선고받아
속초 청학동 이○근(1969년 당시 53세)은 1964년 12월 4일 흥덕호 선장으로, 다음 해인 1965년 11월 29일 행영호 선장으로 두 차례 납북되었다가 귀환하였다. 이○근은 1차 흥덕호 납북과 관련해 수산업법 위반으로 벌금 5백원을 선고받았으며, 2차 행영호 납북사건으로 수산업법, 반공법 위반으로 징역 2년과 집행유예 3년, 벌금 5천원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1969년 2월 다시 보안사령부에 간첩활동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근은 두 차례 납북되어 북한에 군사기밀을 제공하고 지령을 받아 귀환했으며, 북의 지령대로 다시 주민 2명을 대동해 2차로 입북했고, 돌아와서도 주변 사람에게 북한을 고무찬양하고 지하당 조직 암약을 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이○근은 1969년 7월 22일 춘천지방법원 강릉지원에서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고 항소를 했으나 그해 11월 27일 서울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이○근의 1심 판결문에 따르면, 당시 속초시 청학동에 거주한 이○근은 원적지가 함북 길주군 동해면 동이리에 위치한 양도 섬이다. 한국전쟁 중인 1950년 12월 하순에 월남해 1951년 8월부터 속초지구 해안방첩대 임시 군속으로 취직해 선박요원으로 종사했으며, 1952년에는 속초지구 육군첩보대 임시 군속으로 활동하다가 1953년 7월 하순에 그만두었다. 이후 속초와 묵호 등 지역에서 선원으로 종사했다고 판결문에 적시되어 있다. 아울러 재판 기록에는 이○근이 해군방첩대 군속으로 있을 때, 고향 양도 섬에 침투해 사포리 인민위원장을 암살하고 일부 주민을 강제로 남으로 데려왔다는 본인의 법정 진술 내용도 확인된다.
재판 기록에 의하면, 이○근은 법정에서 자신은 납북 귀환 후 대북역용공작을 계획한 HID의 지시를 받아 북한의 지령대로 활동했다고 주장했다. 이○근은 강릉지원 법정에서 “납북귀환 후 HID 공작대장인 이승한과 속초경찰서 정보과 형사에게 이북에서 지령받은 사실을 전부 보고했다”, “지령을 받은 것을 행동할 때도 반드시 HID 이승한의 지시에 의하여 장소와 시간을 정해준 대로 행동했다”고 진술했다. 이○근은 대법원 상소이유서에서도 “이승한 HID 공작대장의 지시에 의해 공작대장이 추천해준 김○옥을 대동하고 월북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HID 공작대장 이승한은 간첩 사건이 터지기 전인 1967년 강원도 최전방에서 폭발사고로 사망했으며, 이○근의 주장은 법정에서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편 이○근이 간첩으로 체포되었을 때, 속초 집에는 부모와 처, 자녀 8명에 손자까지 12명의 대식구가 같이 살고 있었다.
아들 이○원의 살아온 이야기
속초시 교동에 거주하는 이○원(66세)은 2022년 1월 17일 진실화해위원회에 부친 이○근의 명예회복을 바라는 진실규명 신청서를 접수했다. 이 씨는 “부친 이○근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HID 공작원 활동을 했는데, 오히려 억울하게 북에서 보낸 간첩으로 내몰렸다”며, “지금이라도 부친의 억울함을 국가가 나서서 제대로 진실규명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원씨로부터 직접 들은 사연을 요약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아버지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다. 그래서 어머니께 아버지는 어디 가셨느냐고 물었는데, 어머니는 그냥 “아버지가 어디 잠깐 갔다 올 거다”라고만 말했다. 나이가 어렸던 그 때는 아버지가 사라진 이유를 잘 몰랐다. 나중에서야 아버지가 간첩으로 몰려 옥에 갇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붙잡혀 가고, 우리 가족들은 먹고 살길이 막막했다. 하다못해 장국 한 그릇조차도 구하기가 어려웠다. 간첩으로 몰린 가족이라 주변에서 도움을 받기도 힘들었다. 먹을 게 없어 엄마가 초등학교 1학년 동생에게 젖을 물리기도 했다. 다 큰 나도 너무 배가 고파서 어머니의 한쪽 젖을 빨기도 했다.
우리 가족은 청학동 금강아파트 근처 빨간기와집에 살았는데, 아버지가 잡혀가자 그 집을 20만원에 팔아 변호사 비용을 댔다. 그리고 금호동사무소 안쪽 포항장여관 골목 단칸방에 어머니와 우리 형제 자매 7명이 함께 살았다. 조그만 단칸방에 먹을 것도 없고, 너무 춥게 지냈다. 나이 든 형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어머니는 사건의 충격으로 풍이 와서 1974년에 돌아가셨다. 결국 나는 초등학교를 그만두고 배를 탈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인 13살 나이에 학교를 그만두고 배를 탔다. 어느 날 오후 4시쯤에 처음으로 속초 섬 앞의 바다로 오징어를 잡으러 나갔다. 형이 물레를 잡고 돌려보라고 해서 돌렸더니, 오징어 세 마리가 걸려서 튀어 올라왔다. 어린 나이에 오징어잡이 말고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버지가 안 계셔도 매일 양복 입은 어른 두세 명이 우리 집 주위를 빙빙 돌았다. 어린 나한테도 이것저것 많이 물어봤다. 너희 식구 몇 명이냐, 형이 있느냐, 지금 집에 누가 있느냐. 그 사람들은 중앙정보부 요원이나 경찰관이 아니었나 싶다. 그 사람들이 물으면 있는 그대로 다 이야기해줬다. “너 어디 가느냐”고 물으면, “오징어 잡으러 간다”고 말해줬다. 그러면 며칠 있다가는 그 사람들이 또 물어왔다. 어디를 가느냐고. 항상 기관원이 우리를 감시를 하고 있는데, 우리 식구들이 어떻게 먹고 살 수 있었겠나.
오징어잡이를 하면서 묵호로 이사 간 형님 집에서 10년 동안 살았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속초 교동에 단칸방을 얻어 혼자 살고 있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고, 결혼도 하지 못했다. 형제들도 아버지를 원망하며 돌아가셨다. 우리 형제자매만이 아니라 조카들도 피해가 컸다. 취직이 되지 않아 많이 고생했다. 우리는 12남매인데, 아버지가 월남하기 전에 네 명은 이북에서 돌아가셨고, 지금은 울산 누님과 정읍 여동생, 나까지 셋만 살아 있다.
아버지는 13년 6개월 만에 몸이 아파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동해시 묵호 사문동 산꼭대기 조그만 집에 형이랑 살았는데, 아버지가 출소해 큰 형 집을 찾아 오셨다. 나는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있어, 이따금 한 번씩 아버지를 보곤 했다. 아버지는 하반신 다리가 새까맸다. 고문을 받아서 그런지, 다리를 잘 쓰지 못했고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아버지는 자신을 조사한 방첩대원도 찾아가기도 하고, 강릉으로 검사를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끝내 한을 풀지 못하고 3~4년 더 사시다가 1986년에 후두암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함경북도 길주 앞 양도 출신 실향민이다. 양도는 섬이 2개인데, 한쪽 섬에는 청주 김씨가 살고, 한쪽 섬에는 우리 이씨가 살았던 모양이다. 같이 간첩으로 몰린 김○섭씨와 우리 아버지는 아주 친한 사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중에 월남했고, 북파공작원 활동을 하며 대한민국에 헌신했다.
아버지는 두 번 납북되었다가 돌아왔다. 아버지는 나에게 HID 이대장의 지시를 받아 공작 차원에서 북한을 넘나들고 그랬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이대장이라는 사람 집에 갈 때, 어린 나를 데리고 가기도 했다. 누나와 어머니도 이대장을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간첩으로 몰려 법정에 섰을 때, 자신은 공작활동을 벌이는 HID 이대장이 시키는 대로 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이대장은 이미 전방에 지프차를 타고 나가서 루트를 확인하다 지뢰를 받아 죽은 후였다. 이대장이 살아 있으면 우리 아버지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돌아가시지 않고, 우리가 이렇게 어렵게 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과연 이○근은 판결문 내용처럼 납북되어 북한에서 받은 지령에 따라 간첩 활동을 한 것일까? 아니면 그의 주장대로 HID의 대북역용공작 지시에 따라 위장간첩 활동을 한 것일까? 재판부는 판결문에 이○근이 1953년 7월까지 첩보대 활동을 했다고 밝혔지만, 이후에도 이○근이 HID 첩보활동을 했다는 내용이 여러 기록과 문서에서 확인된다. 심지어는 1967년 6월 5일 103방첩대장이 1001방첩처장에게 올린 ‘간첩용의자 잠재 소재 확인 보고’ 문서에서도 “102첩보대에서 당대에서 수사 착수한 점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102첩보대에서 대원 현지 출장 이○근을 도피시킬 우려가 있으니 참고 바랍니다”라고 했다. 육군 방첩대가 주목한 간첩용의자 이○근을 대북공작부대인 102첩보대는 왜 보호하려고 했던 것일까? <계속>
엄경선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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