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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귀환어부 진실규명 이야기<13>
72년 9월 돌아온 어부들, 속초시청에 갇혀…인근 여관서 구타와 고문 받아
등록날짜 [ 2022년06월27일 10시10분 ]

1972년 9월 7일 돌아온 납북귀환어부 1백60명은 속초항으로 돌아온 후 곧바로 버스에 실려 속초시청 회의실에 수용되었다. 그리고 한 명씩 불려나가 시청 앞 해동여관(해동여인숙)에 끌려가서 신문을 받았다. 당시 납북귀환어부가 불법적인 수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정부문서를 지난 4월 정의당 이은주 국회의원이 입수해 공개했으며, 지난 5월 15일 SBS 전국방송에도 관련 내용이 보도되었다. 
1972년 9월 작성된 문서에 나오는 ‘귀환어부 수용 관리 부근 약도’에는 귀환어부 수용장소로 속초시청 회의실(50평), 심문장소로 속초시청 앞 해동여관, 그리고 1차심문 후 분리수용소로 옛 경찰서 뒤 30미터에 위치한 합기도장이 표시되어 있다. 돌아온 어부들은 경찰서에서 정식 조사를 받은 게 아니라, 인근 여인숙에서 불법적으로 신문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1972년 9월 7일 내무부가 ‘귀환어부 처리조종’이라는 제목으로 강원경찰국장에게 보낸 문서에서 내무부는 귀환어부를 속초시내에, 신문 및 신변경비에 용이한 장소에 집단수용하고 경찰 정보요원으로 신문반을 편성해 9월 7일 24:00부터 9.14 24:00까지 신문하고, 신문 방향은 간첩지령사항과 전략정보로 하라고 지시했다. 이 문서에는 경찰이 해경으로부터 귀환어부의 신병을 인수하는 즉시 속초 외항에서 철저한 검역을 실시하라는 내용이 포함된 것을 보면, 이 문서는 납북귀환어부들이 돌아오는 중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미 내무부는 어부들이 배에서 내리기도 전에 불법으로 구금하고 조사를 할 계획을 세워 놓은 것이다. 문서에는 본국(강원도경)과 고성 6명, 속초 10명, 강릉 10명 모두 30명의 신문반을 편성해 2명이 1조로 15개로 편성해 1개조에서 귀환어부 10명~15명을 신문할 것을 지시했다. 당시 강원경찰국은 수시로 귀환어부 수용 및 심문상황을 담은 문서를 내무부장관과 춘천지검 검사장, 중정춘천대공분실장에도 보내 공유했다. 이런 내용의 문서는 납북귀환어부 불법 구금과 신문은 경찰만의 단독 행동이 아니라 정부당국과 대공기관의 지시와 계획에 의해 이뤄진 것을 증명하고 있다. 정부당국의 조직적인 불법 구금과 조사 과정에서 납북귀환어부들은 어떤 일을 당했을까? 

여인숙에 끌려가 갖은 구타와 고문 당해
주문진 대복호를 타고 돌아온 A씨(당시 18세)는 속초항으로 귀환 후 배에서 내리자마자 어디론가 끌려간 뒤 여인숙에 불려가 3,4일 정도 구타와 고문을 받았다. 조사관들은 북에서 받은 지령이 있느냐고 추궁을 하면서 A씨의 손을 뒤로 묶은 상태에서 무릎 안쪽에 장작개비를 끼운 채로 무릎을 꿇게 했다. 고춧가루를 얼굴에 뿌리기도 했다. 조사관들은 당신은 여기서 죽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고 협박하며, 북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사실대로 실토하라고 추궁했다. A씨는 신문이 다 끝나고는 다시 강릉경찰서로 끌려가 구타를 당하며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구속되어 몇 개월 갇혀 있다가 1심 재판에서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수산업법 위반으로 징역형에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출소했다. 같은 배를 탔던 동네형인 이상철, 김용태씨도 함께 고초를 당는데, 이들은 나중에 다시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려 옥살이를 했다. 뒤늦게 진실화해위 1기 진실결정을 받고 재심을 신청해 무죄를 인정받았다. 
속초 해부호 선원 B씨는 납북 당시 14세로 중학교 2학년에 다니던 중 수학여행비를 마련하려고 오징어배를 타고 출어했다가 납북되었다. B씨도 억류에서 풀려나 속초항으로 들어와서는 속초시청 회의실에 구금되어 여인숙에 끌려가서 신문을 받았다. B씨는 이때 전기고문과 고춧가루고문을 받은 걸로 기억하고 있다. 불려나가 조사를 받고 돌아오는 날에는 피죽음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2, 3일 지나 몸이 좀 회복되면 다시 불려가서 재차 고문을 당했다. 본인만이 아니라 같은 배 선원 모두 심하게 고문을 받았다. 이후 B씨는 불구속상태에서 재판에 회부되어 반공법 위반 등으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18세 나이의 B씨는 이 사건으로 결국 중학교 학업조차 중단해야 했다. 
납북 당시 17세였던 속초 명성3호 선원 C씨는 귀환 후 속초시청 회의실에 구금되어 인근 여인숙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았다. 두세 번 끌려가서 몽둥이찜질과 구타를 당했다. 조사를 받으러 처음 여인숙 방에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조사관들은 다짜고짜 구타부터 시작했다. 한참 맞고 나니 조사관이 북에서 지령을 받은 걸 실토하라고 압박했다. 지령을 받은 게 없다고 부인하면, “다른 사람들은 다 북에서 지령을 받은 걸 불었는데 너는 왜 말하지 않느냐”고 다시 뭉둥이찜질을 가했다. 그래서 억지로 조사관들이 불러주는대로 진술서를 작성할 수밖에 없었다. C씨는 신문조사가 끝나고 구속되어 속초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다. 구속된 상태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아 1심에서 반공법 및 수산업법,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18세의 나이에 반공법 위반자가 된 C씨는 1981년 서해안으로 고기잡이를 갔다가 간첩으로 내몰려 10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하고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규명과 재심으로 무죄를 다시 선고받았다. 
속초 승해호 선원 D씨는 20세 나이에 울릉도로 오징어잡이를 나갔다가 납북되어 1년 8일 동안 억류되었다가 귀환하였다. 귀환 후 속초시청 건물에 억류되어 여인숙에 호출당해 신문을 받았다. 이때 조사관들은 D씨에게 북에서 받은 지령을 실토하라고 압박하며 무자비한 폭행과 구타를 가했다. D씨는 불법적인 신문조사를 속초에서만 받은 게 아니었다. 속초에서 여인숙 조사를 마치고 D씨는 물치 군비행장에서 헬기에 태워져 서울 미군부대로 끌려갔다. 여기서 한국인 조사관에게 북한에서의 행적과 북한 정보를 내불라고 1주일 이상 추궁당했으며, 다시 이문동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신문을 받았다. 여기서도 가혹한 구타와 폭행에 D씨는 몸서리를 쳐야 했다. 이 때 잘못 맞아서 귀 고막이 찢어졌다. 2주간 정도 서울에서 조사를 받고 돌아왔다. 
미군부대에 끌려간 어부는 승해호 선원 D씨만이 아니었다. 귀환어부 1백60명 중 배 한 척 당 1,2명, 많게는 6명까지 차출되어 서울 미군부대와 중앙정보부에 불려가 추가 신문을 받았다. 

 

일부는 서울 미군부대, 중정에도 끌려가
같은 날 귀환한 어부 E씨는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E씨가 속초시청 앞 여인숙에 불려가 여닫이문을 열고 방에 들어서자마자, 조사관이 “들어와 이 간나 새끼야, 무릎 꿇고 앉아”라고 겁을 줬다. 겁에 질려 무릎을 꿇고 앉으니 다짜고짜 무릎을 발로 짓밟았으며, “이 빨갱이 같은 새끼야”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때 여관방 입구에는 참나무 장작개비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 장작개비로 수없이 맞았다. 북한에서 뭘 했는지, 북에서 무슨 지령을 받고 왔느냐고 다 불라고 압박하길래, E씨는 북한에서 있었던 일을 있는 그대로 다 이야기했다. 지령을 받은 게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래도 거짓말을 한다고 계속 구타가 이어졌다. 견디다 못해 하도 악이 바쳐서 E씨는 조사관들한테 대들었다. 큰 소리로 악을 쓰면서, “북한에 끌려가서 고생하고 돌아왔는데 우리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렇게 때리느냐”고 항의했다. 화가 나서 방문을 걷어차서 문짝이 부서졌다. 그 소동에 방안이 한 10분 동안 잠잠해졌다. 
조금 있으니 중앙정보부 사람이라며 누군가 방에 들어와서는 E씨더러 선생이라고 부르며 앉으라고 했다. 사이다도 한 잔 부어주고, 담배 피우냐고 묻고는 은하수 담배가 새로 나왔는데 피워보라며 권하기에 담배를 받아서 두 대를 피웠다. 여인숙 방에서 의자에 앉아서 조사를 받은 게 아니라 무릎을 꿇리고, 무릎과 어깨 등을 계속 맞아가면서 조사를 받았다. 조사는 한 사람씩 불려가서 하루나 이틀 정도씩 받고 돌아왔다. 이렇게 한 1주일 정도 조사가 진행되었다. 다른 사람들도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허리와 다리, 어깨를 맞아 다쳤다고 했다. 
어느날 아침 E씨는 양양 물치에 있는 속초비행장에서 헬기를 타고 서울로 갔다. 돌아온 배 한 척당 한 두 명씩 차출되어 불려갔다. 어부들을 태운 헬기는 춘천역 옆에 있는 미군부대에서 내려 잠시 쉬고는 서울 노량진 공군부대에 도착했다. 미군부대였다. 거기에서 내려 한 명씩 따로따로 영창에 끌려 들어갔다. 하루는 이문동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그때도 심하게 구타를 당했다. 그리고 다시 CID(미군범죄수사대)에서 납북귀환어부들을 대상으로 조사와 신문를 진행했다. 미군 2명과 한국군 1명이 한 조가 되어 신문을 했는데, 한 10일~15일 정도 걸렸다. E씨가 서울에서 조사를 받고 나서 속초로 내려오자 유신이 선포되었다. 그리고 구속결정이 나서 속초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구속된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1972년 9월 7일 돌아온 귀환어부들의 증언을 통해 당시 귀환어부 신문과정에서 갖은 구타는 물론이고, 물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그 위에 물을 붓는 물고문, 고춧가루고문, 전기고문까지 가해진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어부들의 비명소리가 여인숙 밖에도 터져 나가고, 심지어는 고문을 못 이겨 벽에 튀어나온 못에 머리를 박고 자살을 하려 했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리던 때, 3천여 명의 환영 인파에 둘러싸여 대한민국의 품으로 돌아온 납북귀환어부들에게 우리 정부가 어떻게 이런 반인권적인 고문과 가혹행위를 했다고 감히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을까? 이제 50년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피눈물 나는 당시의 진실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엄경선 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1972년 9월 정부당국이 작성한 「귀환어부 수용 관리 부근 약도」에는 납북귀환어부들의 신문장소로 속초시청 앞 해동여관이 분명하게 나온다. 자료는 지난 5월 15일 SBS 방송 화면 일부를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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