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들어 남북한 관계에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1969년 7월 아시아 지역에 군사적 개입을 하지 않겠다는 ‘닉슨독트린’이 발표되고, 미국과 중국이 교류를 시작하는 등 세계정세도 데탕트 화해 무드가 조성되면서 우리 정부도 과거의 대북강경 기조를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8월 15일 북한이 무력적화를 포기하면 남북한에 가로놓인 인위적 장벽을 단계적으로 제거할 획기적인 방안을 제시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북한은 8.15선언을 거부했지만, 그동안 취해온 우리 정부의 강경 일변도의 대북정책에 큰 변화를 예고하는 선언이었다. 이에 당시 야당인 신민당 김대중도 2단계 평화협상론을 내놓고, 폭넓은 통일 논의를 위해 반공법 개정을 촉구했다. 집권당인 공화당도 박정희의 8.15선언을 지지하면서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개정도 가능하다고 거론했다.
어로저지선, 뜨거운 선거 쟁점 부상
이런 와중에 1971년 4월 27일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전국에서 선거유세가 펼쳐졌다. 선거과정에서 동해안 해안가에서는 어로저지선 남하가 뜨거운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1971년 3월 30일 신민당 김대중 후보는 3월 30일 강릉과 주문진, 양양에서 유세를 벌였다. 이날 유세에서 김 후보는 “신민당이 집권하면 동해안의 어로저지선을 원상회복, 어민의 안전조업을 철저히 보호하겠으며, 불가피하게 제한조치를 할 때에는 국가가 응분의 보상을 하겠다”며, “동해안의 어로저지선 5마일 남하로 어민에게 연간 10억원의 손실을 초래하고 있는데, 이는 현 정권의 국방능력의 결함 상태를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말했다.
김 후보의 경북지방 유세장 청중들은 무표정하고 박수도 별로 없고 환호도 없는데, 강원도에 들어서면서 청중의 반응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4월 2일자 <조선일보>에서는 김 후보의 유세장에 나온 주문진의 한 아낙네는 “한번 납북됐다 귀환하면 제대로 고기잡이도 못하니 무얼 먹고 사느냐”면서 “저 사람(김 후보를 가리키며)이 되면 살기가 좀 나을까요?”라고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고 보도했다. 유세장 청중도 경북과는 달리 많이 운집했다.
1971년 4월 2일자 <동아일보>에서는 “속초·양양·고성지방에서 이 지역 10만 어민들의 생계와 직결된 어로저지선 환원문제를 놓고 공화, 신민 양당이 공방전을 전개했다”고 보도했다. 공화당 지구당위원장 한병기씨는 “해군 해경의 경비정을 강화해 성어기 3개월 동안만이라도 북한 해안포대의 유효사거리를 피해 3마일 북상해 조업할 수 있도록 조정하겠다”고 공약했다. 신민당 지구당위원장 함종윤씨는 김대중 후보의 유세를 통해 “1968년 11월 28일 이전대로 어로저지선을 북상 환원시키겠다”고 공약했다.
신민당의 공세에 맞서 공화당 김종필 부총재는 4월 12일 속초 유세에서 동해 어민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어로저지선 문제에 대해 “국가안보와 어부납북방지를 위해 현 상태에서 어로저지선을 전면 환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나 성어기 3개월(11월~1월)간은 해군경비강화로 일부 어로저지선을 북상시켜 조업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공약했다.
1971년 4월 13일자 <동아일보>에서는 “공화당측에서도 김대중 후보의 어로저지선 북상 공약이 강원도 동해안 주민들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4월 21일 <경향신문> 선거보도 기사에서는 “어로저지선의 남하로 이 일대 사람들은 망했다”, “물속엣것만 들여다보고 사는데 물속엔 아무것도 없다”라고 지역 어민들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속초어민들 표심, 야당후보에 쏠려
어로저지선 남하와 납북귀환어부 탄압으로 인한 성난 민심은 대통령선거 속초지역 투표결과에 역력히 반영되었다.<표 참조>
당시 속초·고성·양양은 접경지 수복지구로 월남실향민들이 많아 집권여당의 표밭으로 분류되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속초지역은 박정희와 김대중 두 후보의 표차는 단 219표에 불과했다. 김대중 후보의 득표율은 강원도 전체 득표율보다 10% 이상 높게 나왔으며, 속초시내지역에서는 김대중 후보 지지표가 더 많이 나왔다.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의 지역민심이 과도한 어민탄압으로 인해 야당으로 돌아섰다는 것을 대통령선거 득표현황을 통해 알 수 있다.
선거가 끝난 지 3일 만인 4월 30일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박 대통령은 “동해안 어민들로부터 성어기를 맞아 어로저지선을 북상시켜달라는 요망이 있으니, 관계기관이 협의해 대책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4월 27일 대선이 끝나고 바로 5월 25일 국회의원선거를 앞둔 시점이기에 집권 공화당에서는 어떻게든 동해안의 성난 민심을 다급히 잠재우려 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속초·고성·양양은 어로저지선 북상 문제가 최대의 쟁점으로 제기됐다. 공화당 한병기 후보는 “어로저지선 북방 3마일 조업 계속 보장”을 내걸었고, 신민당 함종빈 후보는 “어로저지선 북상 환원”을 내걸고 맞붙었다. 한병기 후보는 장인인 대통령의 후광에 힘입어 어렵지 않게 당선되었지만, 어민들이 많이 밀집한 속초 시내지역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속초지검, 납북귀환어부 1천여명 승선금지
두 번의 선거를 치르면서 확인된 동해안 어민들의 성난 민심을 달래려는 집권여당의 조치로 1968년 11월 25일 5마일 남하시킨 어로저지선을 1971년 11월부터 3개월간 다시 3마일 북상시켰다. 그러나 이것으로 납북귀환어부들에 대한 탄압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성난 민심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더 강경한 기조로 납북귀환어부들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조치를 내놓았다. 그 조치가 너무 가혹해 언론에서도 ‘과잉안보의식’이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냈을 정도였다.
어로저지선 한시적 북상을 앞둔 1971년 10월 28일 대검찰청은 어선 납북을 막기 위해 전국의 어부와 어선 카드를 작성하라고 지시하고, 월선조업을 종용하거나 월선조업을 묵인한 선주도 납북귀환어부와 같이 반공법 위반으로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납북과는 관계가 없는 전국의 어부들을 대상으로 관리카드를 검찰이 작성한다는 것은 어부 집단 전체를 범죄 용의자로 삼는 일이었다. 이러한 대검의 지시에 하루 앞선 10월 27일에는 춘천지검 속초지청장 이갑렬 검사가 어로저지선 북상으로 어선납북이 더 빈번해질 것을 예상해 1966년 이후 북에 납북되었다가 돌아온 어부 1천여명(다른 보도에는 984명이라고 함)에 대해 승선을 금지시키라고 동해안 각 어협에 지시 통보했다. 납북된 사실만 있으면 실형을 받지 않은 어부들도 모두 승선행위를 금지시키라고 했다. 속초지검은 이 같은 지시는 국가안보를 위해 부득이 취해진 것이라며 승선금지 대상자의 구호 및 전업을 알선해 주겠다고 밝혔다. 당시 신문에서는 “검찰의 납북귀환어부 승선금지로 동해안 1천여명의 납북귀환어부 중에도 거진, 아야진 어부 5백여명은 11월 명태잡이 철을 앞두고 승선을 못하면 생계에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며, “동해안 어부들은 고의가 없이 납북됐던 어부들까지도 승선을 못하게 하는 것은 너무 심한 조치라고 반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어부들은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아야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데, 배를 타고 조업하는 것을 막는 조치는 그야말로 어부들의 생존권을 박탈해 굶어 죽으라는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대상자가 한 두 명이라면 몰라도, 1천여 명에 이르는 어부들을 지역의 검찰이 나서서 구호 및 전업알선을 해준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1971년 10월 29일자 <조선일보>에서는 검찰의 납북귀환어부 승선금지조치에 대해 비판하는 사설을 게재했다. 사설에서는 “일선검찰이 관내의 일정한 어민들의 생업을 빼앗는 것이 옳으냐 하는 것은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며 재검토를 촉구했다. <조선일보>는 “원칙론을 말한다면 북의 납북위협으로부터 우리 어부들을 보호하고 우리 어부들로 하여금 안심하고 어로작업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보장해 주는 것이 국가의 책무요, 순리라고 생각한다”며, “모든 납북어부들의 생업을 획일적으로 빼앗는다는 것은 지나친 과잉안보의식이라 할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어민들의 반발로 속초지검의 승선금지조치가 철회되었는지는 후속 보도가 없어 알 수가 없다. 검찰의 강경조치가 내려진 시점은 1971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의 이산가족찾기 제안에 대해 북한적십자사가 호응해 본회담 개최를 위해 여섯 차례나 예비회담을 판문점에서 개최한 후였다. 한반도에 냉전의 얼음장을 녹이는 봄바람이 불기 시작했지만, 분단체제의 희생양인 납북귀환어부들에게는 추운 겨울이 지속되고 있었다. 북한은 여전히 남측 어선들을 납치해갔으며, 남한은 귀환납북어부 전원을 어김없이 서슬 퍼런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용공분자로 내몰아 처벌했다. 엄경선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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