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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귀환어부 진실규명 이야기<7>
어로한계선 넘어 월선조업하면 사형 구형…한해 어민 수백명 처벌
등록날짜 [ 2021년11월29일 16시41분 ]

1968년 11월 25일 정부의 동해안 어로한계선 남하와 강경 조치로 납북어선은 눈에 띄게 줄었다. 1970년 11월 17일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1967년 47척 3백52명, 1968년 90척 7백66명에 이르던 어선 납북은 어로저지선 남하 후인 1969년에는 7척 69명, 1970년(11월 17일까지)에는 10척 92명으로 줄었다. 
그러나 납북사건은 줄어들었지만, 공안당국의 어민 탄압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 납북귀환어부는 납북사유를 불문하고 선원들까지 모두 처벌을 받았으며, 납북이 되지 않더라도 어로한계선을 넘어 월선조업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무더기로 어부들이 구속되어 기소되었다. 
어로한계선을 남하한 지 두 달도 안 된 1969년 12월 31일에는 해양경찰대에서 고성 거진 및 대진항 소속 어선 7척을 월선조업으로 입건하자, 이에 반발해 5백여척의 어민들이 집단 반발해 출어를 중지했다. 어민들이 어로저지선을 넘지 않았는데도 해경이 무리하게 입건했다고 반발했다. 이에 내무부는 어민들의 반발을 무마하려고 해경전방지휘소 소장과 순경을 직위해제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해경은 1주일 후인 1월 6일 속초 청호동 원풍호 등 15척 어부 90명을 월선조업을 이유로 수산업법 위반 혐의로 입건했으며, 2월 10일에는 7척 어부 38명을 같은 혐의로 전원 입건했다.

■어로저지선만 넘어가면 월북 기도한 간첩행위 1969년 5월 29일자 <경향신문> 3면 사회면을 보면, 당시 어선납북이 얼마나 큰 사회적 문제였는지 잘 알 수 있다. 신문 한 면에 모두 4개의 납북어부 관련 기사가 실렸다. 신문 기사에 따르면, 고성 거진항으로 23척의 납북어선과 1백48명의 납북어부가 6개월 만에 귀환했으며, 아직도 20여척이 억류 중이었다. 돌아온 어부 모두 반공법과 수산업법 위반 혐의로 입건되었다. 대검찰청은 돌아온 어부들 중에 어로저지선을 넘어 월북한 어부는 모두 구속기소하고, 앞으로도 어로저지선을 넘어가는 어부들은 모두 반공법으로 구속하라고 현지 검찰에 지시했다. 1969년 5월 29일 현재 어로저지선을 넘어 고기잡이를 하다 적발된 어선은 모두 1백25척, 5백57명이다. 동해에서 82척 4백94명, 서해 43척 63명이 적발되었는데, 이중 49명의 어부는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납북되어 북한에 끌려갔다가 돌아오지 않더라도, 북한 해역으로 넘어가지 않아도 어부들은 정부가 설정한 어로저지선만 넘어가면 월북을 기도한 간첩행위로 간주되어 반공법상 탈출죄가 적용되어 처벌받았다. 1969년 11월 12일 동해어로보호본부는 어로한계선 이북에 설치된 어망 1백81통을 모두 격침하고 월선조업선에 대해 남하 조치에 불응하면 발포하겠다고 발표했다. 해경은 월선조업은 중대범죄로 간주하고 발포를 해서라도 근절시키겠다는 강경한 입장이었다. 
1969년 한 해 동안 월선조업으로 입건되어 처벌받은 어민들은 얼마나 될까? 신문에서는 5월 29일까지 적발된 월선조업 어선과 어민은 모두 1백25척, 5백57명이라고 했는데, 이후에도 월선조업 적발건수는 계속 늘어났다. 신문에서는 1969년 10월 23일 대진항 소속 대복호를 비롯한 4척의 선원 37명이 월선조업을 하다가 적발되어 전원 구속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리고 11월 5일에는 어부 77명, 12월 9일에는 속초항 어선 5척의 선장 5명이 월선조업으로 구속되고 30명이 입건되었으며 어선은 모두 압류되었다. 그해 12월 30일 <매일경제> 보도에 따르면, 지난 11월 1일부터 활동을 개시한 동해어로본부가 12월 30일까지 2개월 동안 월선조업 어선 43척을 적발해 2백88명의 어부를 입건, 지난해 73척 5백11명보다 30척, 2백23명이 줄어들었다. 1969년 한 해 동안 신문에 나온 동해안 월선조업 적발건수를 집계하면 129척, 8백30명에 이른다. 이들이 모두 수산업법이나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된 것이다. 

■어로한계선 남하는 어민들 생명줄 끊는 조치 1년 동안 동해안에서만 8백여명의 어부가 월선조업으로 입건되어 처벌받아 범법자가 되는  사태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왜 어민들은 강경한 정부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금지선을 넘어 조업을 강행하다가 적발되어 범법자가 되어야 했을까? 당시 어로한계선 남하로 명태 황금어장을 잃은 어민들은 처벌을 받더라도 금지선을 넘을 수밖에 없을 만큼 생계가 절박했다. 명태 황금어장을 포기해야 하는 어로한계선 남하는 곧 동해안 전체 어민들의 생명줄을 끊는 조치였기 때문이다. 당시 신문에서는 어로저지선 남하로 절량 위기에 빠진 동해안 어민들의 비참한 현실을 현장 취재를 통해 보도했다. 

대진어협 관내 1만2천8백10명의 어민들은 해마다 더해가는 흉어로 어로저지선이 남하된 지 만 2년이 지난 현재, 30% 이상이 정든 항구를 떠났으며, 남아있는 9천여명도 이주를 서두르는 등 상가는 대부분 문을 닫고 철시, 지난날의 흥청거리던 때와는 판이한 폐항의 거리로 변모되어가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동해안 각 항구의 경기가 거의 같은 실정이다. (생략) 어로저지선이 남하한 69년도에는 6천7백톤의 어획고로 65년도보다는 자그마치 75%의 극심한 감소율을 보였다. (생략) 금년도에는 이상조류로 예년의 25%의 어획고로 극심한 명태 흉어를 보여 동해 어민들은 월동준비를 포기한 채 영세어민의 30%가 절량상태로 당국의 구호를 아쉬워하는 실정에 이르고 있다.   
- “생계 아득한 동해어민 / 저지선 남하와 어족 고갈로 대흉어”(1970년 12월 12일자 <동아일보>) 

1970년 이후에도 월선조업 적발 처벌은 계속 이어졌다. 1970년 8월 31일 거진항 소속 영풍호 등 어선 3척, 49명이 월선조업으로 반공법, 수산업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그해 12월 6일 대진항 어선 4척, 선원 27명이 같은 혐의로 입건되었다. 12월 28일에는 묵호항 소속 동해호가 월선조업으로 북한 쾌속정에 납북되는 상황에서 아군의 구출작전으로 납북을 면했지만 선원 2명은 반공법과 수산업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고 4명은 불구속 입건되었다. 1971년 1월 9일에는 거진항 영춘호 등 어선 7척, 선장 7명이 월선조업으로 반공법과 수산업법 위반으로 구속되고 선원 56명이 불구속 입건되고 선박은 모두 압류되었다. 그해 6월 9일에는 가진항 소속 영광호를 비롯해 범선과 종선 선원 90여명이 꽁치잡이를 위해 월선조업을 하다가 적발되어 모두 반공법과 수산업법 위반 혐의로 입건되어 수사를 받았다. 1971년 한해 동해안에서 월선조업으로 구속된 어부들은 모두 3백명에 이른다. 
월선조업 적발은 1971년 10월까지 계속 이어졌지만, 신기하게도 그해 11월 명태성어기에 들어서면서 월선조업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1971년 11월 1일자로 어민들의 지속적인 요구로 명태 성어기인 11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4개월간 한시적으로 동해 어로한계선이 3마일 북상 조치되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월선조업으로 어부들이 무더기로 입건되었다는 신문기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1968년 11월 어민생존권을 위협하며 무리하게 어로한계선을 남하시킨 정부의 조치가 영세어민들을 사지에 내몰아 월선조업이라는 범법행위를 벌이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의 월선조업을 어민들의 준법정신 부족과 어획 욕심 탓으로만 돌릴 수가 없다. 월선조업 어민들에게는 납북의 위험이나 당국의 사법 처벌보다도 가난과 빈곤으로 인한 생존권 위기가 더 무서웠던 것이다. 

■검찰이 강경방침으로 어민탄압 앞장서  어로한계선 월선을 이유로 한 어민탄압은 1970년 11월 최고조에 이르렀다. 1970년 11월 17일 강릉에서 검찰과 군경 관계자들이 모여 동해안지구 어로보호대책회의를 가졌다. 당시 회의를 주재한 대검찰청 한옥신 검사는 이 자리에서 어로한계선을 넘어 조업을 한 어부들에게 사형까지도 구형하겠다는 강경한 방침을 발표했다. 
한 검사는 “어로저지선을 넘어 고기잡이를 하는 것은 스스로 납북을 초래하는 미필적 고의가 인정된다”라며, 월선조업에 대해 “반공법상 반국가단체 지배지역으로의 탈출죄를 적용해 최고형인 사형까지 구형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 검사는 “납북어부가 북에 끌려간 뒤 우리나라 사회 실정 등을 알리는 것은 ‘협박에 의하여 강요된 행위’로 간주해 죄를 묻을 수 없다는 것이 지금까지 판례 입장이었으나, 납북을 어부가 스스로 자초한 것으로 인정될 경우에는 최고 사형까지 규정되어 있는 국가보안법상 국가기밀누설죄의 적용을 받게 된다”라고 했다. 그리고 “2회 이상 납북됐던 어부들은 승선을 금지시켜라”고 지시했다. 검찰은 월선조업은 곧 어부가 납북을 자초하는 행위이기에 최고형인 사형까지 구형해 엄벌에 처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이었다. 
이 회의가 있기 6일 전인 11월 11일 동해안 어민들은 어로저지선 남하로 막대한 피해를 보고 있으니 어로저지선을 3마일 북상시켜달라고 관계당국에 다시 건의했다. 어민들의 절박한 요구는 이날 회의에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검찰의 강경한 방침으로 인해 어로한계선 월선 여부가 납북귀환어부 처벌의 기준이 되었다. 심지어 검찰은 우리 해역에서 강제 납북된 것이 분명한 어부들도 스스로 월선조업을 해서 납북되었다고 사건을 조작해 구속하기도 했다. 어로한계선(어로저지선)은 당초 정부가 우리 어민을 납북피해로부터 보호하려고 설정한 보호선이다. 그러나 월선조업을 수산업법만이 아니라 반공법상 탈출죄를 적용해 처벌한 검찰의 강경 조치로 어로한계선은 어민보호선이 아니라 어민처벌선으로 둔갑하고 말았다. 어로한계선은 어민통곡선이 되고 말았다.          

엄경선 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1970년 11월 18일자 조선일보 기사. 어로저지선을 넘는 월선조업어부에게 사형까지 구형키로 한 대검찰청의 강경방침이 보도되었다. 
 

<바로 잡습니다> 지난호에 실린 ‘납북귀환어부 진실규명 이야기 6’에 실린 창동호 귀환 사진은 <경향신문사>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https://archives.kdemo.or.kr)에 제공한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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