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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귀환어부 진실규명 이야기<5>
취약한 국방력이 어선납북사건 불러왔다
등록날짜 [ 2021년10월25일 17시07분 ]

월선조업은 월북이 아니다
1960년대 말 어선납북사건이 빈번히 발생하자 공안당국은 납북사건이 월선조업으로 발생했다며 어민들을 엄하게 처벌했다. 납북사건이 모두 어민들의 월선조업 때문에 발생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정부가 어민들을 보호한다고 설정한 어로한계선을 넘었다는 이유로 어부들을 간첩으로 내몰아 국가보안법, 반공법으로 처벌한 것도 타당하지 않다. 
월선조업은 어선안전조업법에 규정된 ‘조업한계선’을 넘어가 조업을 한 것을 말한다. 어선안전조업법에는 ‘조업한계선’은 조업을 할 수 있는 동해 및 서해의 북쪽 한계선을 말한다고 나와 있는데, 지금도 보통 어로한계선이라고 부른다. 
현행 법령에 규정된 동해조업한계선은 북위 38도 33분 09.83초와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저진리 해안선의 교차점과 북위 38도 33분 09.83초, 동경 132도 34분 07.58초를 연결한 선을 말한다. <동해조업한계선도 참조>
현재 동해조업한계선을 넘어 북쪽에서의 조업은 금지되나, 저도어장은 매년 4월1일부터 12월 31일까지 고성 어민이 조업가능하고, 동해북방어장은 매년 10월 1일부터 다음해 3월 31일까지 강원도 어선만 조업이 가능하다. 
1953년에 체결된 정전협정에서 육상의 군사분계선은 합의되었으나 동해안 해상군사분계선은 합의된 내용이 없다. 다만 동해안의 경우에는 육상이 군사분계선을 연장한 선(북위 38도 36분 45초)을 해상분계선으로 남북한이 암묵적으로 수용하고 있을 뿐이다. 
현재 우리 정부가 설정한 조업한계선은 해상분계선 남쪽 8km 지점이다. 동해안 연안에서는 조업한계선을 넘었다고 해도 바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 해역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월선조업이 곧 월북이라고 알고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어로한계선은 그야말로 우리 어선과 어부들을 보호하고 납북을 방지하기 위해 해상 군사분계선 훨씬 남쪽에 우리 정부가 정해놓은 조업규제선이다. 1950년대에는 어로저지선, 1969년 3월 10일 이후에는 어로한계선, 1994년 1월 이후에는 어로허용선으로 이름이 변경되었으며, 지금은 ‘조업한계선’으로 불린다. 
어 조업한계선은 1950년대부터 수시로 변경되어 왔다. 동해안 주요 어획물인 명태어장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수산당국이 수산진흥을 위해 어로한계선을 북쪽으로 올리기도 했고, 납북사건이 빈번하면 다시 남쪽으로 내리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어로한계선의 변경에 따라 동해안 어민들은 희비가 엇갈렸다. 수산당국과 어민들의 요구로 어로한계선을 북상하면 명태어획량이 대폭 늘어났지만, 반면에 납북사건도 더 많이 발생했다. 이처럼 정부의 정책에 따라 수시로 변경되어온 어로한계선 월선 여부가 우리나라 체제를 위협하는 공안사건을 가르는 절대 기준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어민을 보호하기 위해 설정한 이 어로한계선이 공안당국의 악용으로 1960년말에는 어민들을 간첩으로 내몰아 처벌하는 수단으로 전락해 버렸다. 공안당국은 납북귀환어부들을 마땅히 처벌할 규정이 없으니, 당사자들이 잘못해서 월선조업을 했기에 납북되었다고 사건을 조작해 어부들을 처벌했다. 월선조업을 했다고 해도 월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공안당국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월선조업을 빌미로 납북어부를 모두 간접간첩으로 낙인을 찍어버린 것이다. 납북피해어민들은 북에 의해 우리나라 영해에서 강제로 납치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언론보도와 주변 증인 등을 통해서도 충분히 확인된다. 

취약한 해상국방력이 납북사건 원인이다 
동·서해안의 어선납북이 계속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당시 우리나라의 취약한 해상국방력을 들 수 있다. 우리 영해로 넘어 들어와 무력으로 어선들을 납치해 가는 사건이 계속 발생해도 정부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아무 대책을 세울 수 없었다. 결국 정부는 스스로의 무능력으로 빚어진 어부 납북의 책임을 당사자인 납북어부들에게 돌려 처벌했다. 정부의 무능을 감추고자 어민들을 희생시킨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언론보도 내용을 통해서 충분히 확인된다. 
1966년 들어 동해안에서 북한의 어선납치는 더욱 극렬해졌다. 1966년 1월 26일 동해안 어로저지선 부근해상에서 명태잡이 어선 5척이 어로저지선 부근 해상에서 피격을 당했다. 북한 어뢰정(PT) 3척과 쾌속정(MSF) 2척이 갑자기 우리 어선을 덮쳐 기관포와 다발총을 퍼부어 우리 어선의 선장 1명은 즉사하고, 3명의 어부가 중상을 입었으며, 어선 2척과 12명의 어부가 납치되었다. 이 사건 이후 동해안에서는 같은 유형의 어선납북사건이 계속 이어졌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당시 야당이었던 김대중 대변인은 “요즘 동·서해안에서 연발하는 어선 피격, 납치사건으로 국민은 극도의 불안감에 사로잡히고 있으나 정부와 군 당국의 수수방관적인 태도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고 비난하며, “정부 당국의 신속하고 책임 있는 조치를 거듭 촉구한다”라고 말했다. 당시 신문에서도 “북한 함정이 우리나라 해역을 수시로 넘나들고 있다”며, “해상방위태세를 확립하라”라고 촉구했다. 집권당인 공화당도 “해상경비 경찰관 2백명을 증원하고 쾌속정 도입을 위한 장기차관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당시 이미 밀수 등에 쾌속정이 이용되고 있었으며, 북한과 중국도 쾌속정을 도입한 상태였지만 우리나라는 미처 도입하지 못했다. 이후 쾌속정 도입은 초미의 국방 현안으로 계속 거론되었지만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1967년 11월 3일 동해 어로저지선 부근에서 북한 무장쾌속정 7척과 구축함 2척이 무차별 총격을 가해 우리 어선 10척과 어부 60명을 납치해가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언론에서는 동해안 어선 납북사건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연례행사처럼 되풀이되고 있는데도 우리 함정들은 피랍 소식을 전해들은 후에 현장으로 달려갔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특히 언론에서는 “해군력의 강화를 부르짖고 미국 측에 협조를 요청해왔는데, 적어도 어부들이 안심하고 고기를 잡을 수 있는 정도의 평화는 확보되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어선납북사건뿐만 아니라 당시 동·서해안 해상에서 남북 무력충돌이 발생해 우리 측 피해도 컸다. 동해안에서는 1967년 1월 19일 해군 56함이 북한 지상포 공격으로 침몰했으며, 1968년 1월 23일 미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나포되어 11개월만인 그해 12월 23일 선원들만 간신히 송환됐다. 당시 쾌속정을 이용한 북한 간첩침투사건도 빈번히 발생했다. 1968년 11월 3일에는 울진 삼척 일대에 해상으로 무장공비 60명이 침투하기도 했다.  

고속 쾌속정 도입, 절박한 국방 현안이었다
1970년 6월 5일 서해안에서는 해군방송선이 피랍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방송선을 납치해간 북한 함정은 40~50노트 고속으로 중무장한 함정이지만, 우리 방송선은 불과 8노트에 20mm 기관포만 무장했을 뿐이었다. 이같은 사실을 전한 신문에서는 “북한에는 이런 고속 함정이 70여척이나 있는데, 정부가 여러 차례 미국 측에 고속함정 도입을 추진했지만 실현되지 않아 대간첩작전이나 어선보호에 큰 문제가 있다”라고 보도했다. 
해군방송선, 어로지도선까지도 납치되는 상황에서 일반 어선은 북한의 납치 도발 앞에서 대응할 힘이 없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동·서해안에서 대낮에 북한쾌속정이 넘어와 우리 어선을 버젓이 납치해 갔지만, 우리 군과 경찰은 30노트 이상의 고속 쾌속정을 추격 대응하기에는 아예 불가능했다. 미국은 1965년 월남파병을 조건으로 우리나라 국방력 약화를 보완하기 위해 국군현대화를 약속했지만 이행하지 않았다. 수차례 정부는 고속 쾌속정 도입을 요구했지만, 미국은 확답을 주지 않았다. 월남전을 치르기에 버거운 미국은 남북한의 분쟁과 갈등고조를 원치 않았다고도 한다. 
 쾌속정 도입이 성사되지 않자 정부는 결국 자체 쾌속정 제작에 나섰다. 1968년 2월 9일 전국대학 총학장과 교육감들은 회의를 통해 전국의 학생과 교직원들이 쾌속정 헌납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이후 전국 학생들이 방위성금을 모은 덕에 1973년 4월 우리 기술진에 의해 ‘학생호’라는 이름을 붙인 쾌속정이 건조되어 취항했다. 
당시 어민들의 주장대로 수백 척이 나선 조업현장에 북한의 납치 도발을 막을 쾌속정이나 함정이 제대로 배치되어 있었더라면, 억울하게 어부들이 납북되는 사건도, 납북피해자인 어부들이 돌아와서 다시 간첩으로 내몰리는 비극도 없었을 것이다. 정부의 무능으로 빚어진 납북사건임에도 수십년이 지나도 납북귀환어부들에게 씌워진 굴레는 아직 벗겨지지 않았다. 왜 3천7백여명이나 되는 많은 어부들이 납북되었는지, 무슨 이유로 1천여명이 넘는 납북귀환어부들이 공안사범으로 처벌받았는지, 지금이라도 제대로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 
엄경선 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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