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
뉴스홈 > 기획특집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쪽지신고하기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기사스크랩 이메일문의 프린트하기
납북귀환어부 진실규명 이야기<2>
“납북귀환어부는 간접간첩, 모조리 구속하라”
등록날짜 [ 2021년09월06일 14시40분 ]

1959년 5월 28일 거진항으로 돌아온 어선 23척과 150명의 선원 중에는 지난해 10월 30일 북에 끌려갔다가 7개월이 다 되어 억류에서 풀려나 돌아온 길성호 선장 강아무개씨도 있었다. 납북 당시 강씨의 나이는 26세였다. 지난 2009년과 2012년 두 차례에 걸쳐 고성에 사는 강씨로부터 납북사건으로 인한 피해 사실을 직접 전해 들었다. 강씨는 당시 납북사건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했지만, 아직도 억울함을 풀어내지 못했다.   
  
길성호 선장 강씨 이야기
 “1968년 10월 30일 길성호를 타고 명태잡이를 나갔다가 납북되었다. 그때 나는 자배 자선장이었다. 북위 38도 33분선 근처에서 조업했는데 북한 쾌속정 2~3척이 쫓아와 갈쿠리를 던져 배를 끌어 납치해갔다. 그 많은 배중에도 그들은 크고 좋은 배만 골라서 잡아갔다. 납치가 이뤄지던 바다에는 수백 척의 어선이 조업 중이었는데 어업지도선 한 척이 저도섬 근처에 있었고, 해군함대는 바다 쪽으로 1~2척이 있었을 뿐이었다. 북한 쾌속정이 쫓아와서는 배를 멈추라고 요구했지만, 선장인 나는 이에 응하지 않고 계속 남쪽으로 내려갔다. 결국 뒤쫓아 온 쾌속정에 붙들려서, 북한군이 배에 넘어와 총 개머리판으로 내 뒤통수를 때리는 바람에 기절해서 다음날이 되어서야 깨어났다. 그 후유증으로 지금은 한쪽 눈이 거의 실명 직전의 상태라 강릉 아산병원에서 치료를 계속 받고 있다. 
6개월 정도 북에 있다가 귀환하여 배 선장이라고 해서 반공법과 수산업법 위반으로 1년 실형선고를 받고 대전교도소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후에도 10년간 형사들이 매일 찾아오다시피 했다. 한번은 납북귀환어부 출신인 매제가 간첩으로 몰리는 바람에 나도 관련자로 몰려 강원도 대공분실 사람들에게 불려가서 조사를 받았다. 또 한번은 20명의 납북귀환어부가 한꺼번에 속초 검찰청 지하실로 불려가 하루동안 구타와 고문을 받으며 조사를 받았다. 무릎 사이에 장작을 넣어 짓밟고 무차별 구타를 가했다. 납북되었다 돌아와서도 잠을 정상적으로 이룰 수 없었다. 하루에 막걸리 2~3통은 먹어야 잠을 이룰 수 있었다. 
 경비 함정 하나 없는 바다에서 총칼을 앞세운 북한 쾌속정을 누가 감히 이겨낼 수 있을까. 자의로 북으로 넘어갈 사람은 하나도 없다.”

 

간첩으로 내몰린 박씨 이야기  
강씨가 선장인 길성호를 같이 타고 납북되었다가 돌아온 고성군 대진의 박아무개씨도 돌아오자마자 고성경찰서에 끌려가 북한에서의 행적을 추궁당했다. 박씨는 북에 납북되어 억류되었을 때 젊은 사람은 귀환조치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을 비롯해 납북자들이 1개월 동안 단식도 했다고 진술했다. 그럼에도 박씨는 기소되어 실형을 선고받고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러나 박씨는 납북피해사건으로 감당할 수 없는 불길한 일이 닥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박씨는 돌아온 지 3년 후인 1972년에는 경찰관과 함께 시골을 돌면서 반공교육을 하기도 했으며, 1974년 5월에는 간첩신고로 상금 50만원을 탔다. 1977년 3월에는 박씨 부인이 수상한 사람을 신고하여 상금 15만원을 탄 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8년 7월 4일, 박씨는 고성경찰서에 구속영장도 없이 불법 연행되어 22일간 북에서 간첩 지령을 받고 간첩활동을 한 것을 실토하라고 압박하는 형사들로부터 온갖 구타와 가혹행위를 당했다. 고춧가루를 푼  물을 코로 집어넣는 물고문까지 당했다. 결국 형사들이 거짓으로 꾸민 조서에 따라 북의 지령을 받고 군사기밀을 수집하는 등 간첩활동을 하고 북한을 고무찬양을 한 혐의로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했다. 
박씨는 지난 2012년 재심을 청구해 2014년 2월 13일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무죄를 확정받았다. 1978년 불법으로 구속된 지 만 36년 만에 억울한 누명을 벗었다. 박씨를 간첩으로 조작한 당시 고성경찰서는 박씨를 시작으로 80년대에도 수차례 납북어부 간첩조작사건을 만들어 냈다. 

 

납북귀환어부를 간첩으로 간주한 경찰
북에 강제로 끌려가는 과정에서 저항하다가 크게 다친 길성호 선장 강씨나 남한으로 빨리 송환해달라고 단식까지 했다는 박씨도 수개월 억류 끝에 돌아올 때는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으리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북에 억류 중이던 1968년 11월 21일 경찰은 납북귀환어부를 모두 간첩으로 간주해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1968년 11월 22일 동아일보에는 “월선어부는 간접간첩으로 규정하고, 반공법을 적용해 모조리 구속할 것”이라는 해양경찰대장의 발언 내용이 실렸다. 해양경찰은 북에 끌려가지 않더라도 어로저지선을 넘어 월선조업을 한 선원들도 모두 반공법을 적용해 구속하겠다고 했다. 

 

월선어부 간접간첩으로 규정
반공법 적용 모조리 구속 
신(申) 해양경찰대장 말

[부산] 21일 신용관 해양경찰대장은 동해 어로저지선을 넘어 조업하다 북괴 무장경비정에 납북된 어민들은 사실상 간접적인 간첩이라고 규정하고 앞으로 어로저지선을 넘는 어부들을 반공법을 적용, 모조리 구속하는 경경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다. 신대장에 의하면 납북되었다가 돌아온 어부들을 조사한 결과 북괴는 납북어부에 대해 상투적인 수업의 하나로 최대한의 대우를 해주면서 공장 등을 시찰시켜 어부들의 환심을 사고 우리나라의 군사 경제 사회상 등을 일일이 물어 그들의 소위 대남공비 투입 등 갖가지 첩보활동의 자료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북괴가 이같이 납북어부들을 환대, 때때로 현금과 식량까지 주어 돌려보냄으로써 동해에서 조업하는 어부들 가운데는 붙들려도 대접받고 돌아온다는 생각에서 고의로 저지선을 넘을 수도 있다고 지적. 이 경우의 월선(越線)행위는 분명 간접적인 간첩행위라면서 앞으로는 모조리 반공법을 적용, 구속하겠다고 밝혔다. [부산] 동해어로저지선을 넘는 어선을 단속하고 있는 해경은 21일에도 14척의 어선과 선원 84명을 검거, 우선 수산업법 위반 혐의로 입건하고 반공법 적용 여부와 구속 여부를 검토 중이다. 한편 지난 13일부터 21일까지 검거한 월선어선은 72척에 선원이 399명이다.<1968년 11월 22일 동아일보>

 

 이 발언이 있은 지 이틀 후인 1968년 11월 23일 동해안 어민들을 절망케 하는 정부 조치가 발표되었다. 11월 22일 저녁 국무회의에서 동해어로저지선을 5마일 남하하기로 결정하고 23일자로 이 조치를 공포했다. 어로저지선을 넘는 어부들에게는 반공법 등 관계법령을 적용해 엄중히 처벌키로 했다. 이 결정은 북한의 어부 납북사건과 해상을 통한 무장공비 침투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어로저지선 남하를 공포하기 한 달 전인 10월 24일부터 동해안 일대에 폭우와 폭설에 이어 큰 해일까지 덮쳐 수십명이 사망하고, 어선 1천4백여척이 전파, 4백여척 반파, 1백여척이 유실되었다. 간신히 해일을 피한 어선들이 처음으로 출어한 10월 30일 강씨와 박씨가 타고 나간 길성호도 북한 쾌속정에 납치되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동해안 해일 피해 시찰을 위해 대통령이 거진항에 찾아온 날이었다. 
 유례없는 해일로 온통 생지옥이 된 동해안 바닷가에 다시 납북사건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본격적인 명태조업을 앞둔 시점에 어로저지선이 남하되면 어민들은 모두 생계가 막막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민들은 어로저지선 남하에 크게 반발했다. 
 1968년 12월 1일 동해안 60만 어민대표들은 속초에서 강원도어민투쟁위원회(위원장 허창섭, 거진어협장)를 결성하고 어로저지선이 환원될 때까지 무기한 투쟁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어민대표들은 정부가 어로저지선을 5마일 남하시킨 것은 영해에 대한 주권의 포기이며, 황금어장의 축소로 어민생계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져오게 될 거라면서 종전 선인 북위 38도 34분 45초선으로 북상시키라고 요구했다. 당시 동해안어민들에게는 납북의 위험보다도 당장의 생계가 더 절박했다. 월선조업을 하면 간접간첩으로 간주해 반공법으로 처벌하겠다고 정부가 강경한 방침까지 내놓았음에도 어민들이 정부와 투쟁하겠다고 결의한 것은 그야말로 절박한 생존권을 지키겠다는 절규였다. 하지만 어민들의 절규는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엄경선 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신용관 해양경찰대장이 납북어부는 간접적인 간첩행위라면서 앞으로는 모조리 반공법을 적용, 구속하겠다고 밝혔다고 보도한 1968년 11월 22일치 동아일보.

 

[ⓒ 설악신문(www.soraknews.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설악신문 (soraknews@soraknews.co.kr) 기자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좋아요 0 싫어요 0
관련뉴스
- 관련뉴스가 없습니다.
“자연환경·시민 마음 쓰다듬는 ‘쓰담속초’를 아시나요” (2021-09-20 11:10:00)
든든한 복지안전망 역할로 코로나19 극복하는 무산복지재단 ① / 양양군노인복지관 (2021-08-30 14:50:26)
속초시 코로나 누적 확진자 5백...
건봉사~북한 신계사 ‘금강산순...
고성군, 소규모 군유 토지 매각
고성군 하반기 주요·현안사업 ...
속초시 국민지원금 오프라인 신...
양양군의회 제2회 추경예산 수정...
1
기고 / 속초의 미래상이 궁금하다
지난 7월초부터 노학동 서울시 공무원 수련원에 설치·운영되고 ...
2
불편함 감수하면서도 ‘교복 착용 지지(57....
3
사는 이야기 / DMZ 탐방 평화 아카데미
4
속초 곳곳에 무인판매점 늘어나
5
‘플랫폼 속초’ 시대를 설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