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에 논 50마지기 헌납 / 불에 탄 내원암 다시 지어
양양공회당 건축비 20원 의연 / 좁쌀 20가마니 기근인에 분배
지난해 11월 설악산 토왕성폭포전망대를 들러 내려오는 길에 소공원 북쪽에 있는 신흥사 부도탑을 찾았다. 멀리 토왕골 일대의 흰눈이 바라보이는 양지 바른 곳에 신흥사에서 배출한 고승들의 사리탑과 사리비가 여러 개 자리잡고 있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는 가운데 비석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비구니 김수영 공적기념비.
걸출한 고승의 사리탑들과 함께 자리한 한 비구니 스님의 공적기념비. 김수영이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봤다. 공적기념비는 비좌와 비신, 이수를 갖추고 있는 높이 2.15m의 비석으로, 옥개석은 팔작지붕형으로 조성되어 있다.
공적기념비 앞면에는 ‘貢畓五十斗落惠施金元/比丘尼金壽永功績紀念碑/以助禪院資粮○○永新’라고 세 줄로 공적 내용이 적혀 있다. 뒷면에는 ‘住持 洪興雲 監事 崔觀洙 法務 禹世烈 石工 于文芳 / 佛紀二千九百六十年癸酉九月立’라고 적혀 있다.
짧은 한자 실력으로 내용을 해석해 보면, 비구니 김수영의 공적기념비는 1933년 9월에 신흥사 주지 홍흥운, 감사 최관수, 법무 우세열, 석공 우문방이 세웠다. 공적 내용으로 보면 50마지기(斗落)의 논을 사찰에 내놓아 선원의 양식을 조달할 수 있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보인다.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보통 1마지기를 2백평으로 치면 1만평 규모의 논을 사찰에 내놓은 것이다. 그것으로 사찰의 양식을 조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으니 주지의 이름으로 공적기념비를 세울 만한 일이다.
당초 이 비도 신흥사 경내에 자리했던 것으로 다른 부도들과 함께 이곳으로 옮겨졌다. 고승들의 사리탑과 함께 세워져 있는 비구니 승려의 공적비. 비구니 승려가 1만평 규모의 논을 사찰에 내놓았다면 지극한 불심은 차치하고라도 그 재력이 보통일 수가 없다. 김수영이라는 인물에 대해 궁금증이 발동했다.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내용은 비구니 김수영은 불에 탄 신흥사 내원암을 다시 발원하여 지은 이로 알려져 있다. 동국대에서 발간한 한국사찰전서에 따르면, 내원암(內院庵)은 652년 신흥사의 전신인 향성사 창건 당시에 같이 지어진 능인암이었는데, 향성사와 함께 불에 타 701년 의상(義湘)대사가 이 터에 선정사를 창건했다. 설악산의 대표적인 미타도량으로 1,000년을 지냈으나 1642년 선정사가 불에 타자 지금의 신흥사로 옮겨갔다. 그 후 선정사 자리에 내원암이 들어서고 1860년과 1885년에 다시 불에 탔다. 그로부터 20년 가까이 지난 1914년 금강산 신계사에서 수도하다가 이곳을 찾은 비구니 김수영(金壽永)이 사재를 헌납해 선원을 짓자, 전국의 참선 수행자들이 운집했다. 1936년 다시 불에 타 조그마한 규모로 중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내원암 현판은 추사(秋史)김정희가 성지 순례길에 들러 남긴 것이라고 한다.
김수영의 행적은 동아일보 1926년 1월 17일자 4면 12단 단신 기사에서 찾을 수 있었다.
특지(特志)와 자선(慈善) / 공회당 건축비 의연(義捐)
강원도 양양군 도천면 신흥사 여승 김수영(金壽永,56세)은 자기가 거주하는 도천면에 양양군 공회당(公會堂, 공공회관) 건축경비 부족액 40원 중에 현금 20원을 자진하여 내놓았는데 일반 사람들은 김여승의 특지(特志)를 칭송한다고.(襄陽)
그로부터 6개월 후인 1926년 6월 15일자 조선일보 1면에는 김수영의 빈민구제 행적이 실렸다.
김수영 여사 제빈(濟貧)
양양군 도천면 장항리 신흥사 내에 있는 김수영(金壽永) 여사는 해당 도천면과 강현면 양면의 기근(饑饉)에 우는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 인류애에 넘치는 사랑으로써 속미(粟米,좁쌀) 1백20말(斗)을 매입하여 각 기근인(饑饉人)에게 분배하였다고 일반사람들의 칭송이 자자(藉藉).
김수영의 같은 빈민구제 행적은 1926년 7월에 발간된 불교계 잡지인 <불교>25호에 실렸다.
비구니(比丘尼) 김수영(金壽永)의 공적(功績)
강원도 양양군 신흥사 내원암에 거주하는 비구니 김수영은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인 1913년도(大正2년)로부터 자기 소유 논 50여 마지기를 절(내원암)에 헌납하고 선원(禪院)을 개설하여 영원한 규모를 세워 찾아오는 납자(衲子, 승려)로 활구(活句)를 제시(提?)케 하며 올해 봄에 이르러서는 부근 부락에 궁민(窮民)을 구휼하기 위하여 금 이백원으로 좁쌀(小米) 20가마니를 사들여 빈사(瀕死)의 기민(飢民)으로 하여금 목숨을 다시 살리게 하였음에 그 자선심(慈善心)이 풍부함을 원근 인사(人士)가 칭찬을 마다하지 않다더라.(襄陽)
당시 돈 이백원은 화폐 가치와 물가 수준을 따지면 지금의 1천만원 정도에 해당하는 거금이다. 아사 직전의 주민들을 살려내기 위해 선뜻 1천만원의 거금을 내놓는 일은 당시로서 쉽지 않은 일이다. 만주사변이 발발한 후 동아일보가 주관한 재만피란동포 위호금 모금에 당시 신흥사와 건봉사 주지들도 참여했는데, 1931년 12월 17일자 동아일보에 보면 신흥사 주지 홍흥운이 50전, 건봉사 주지 황성민이 50전을 내놓았다. 자선사업이라는 게 생소했던 그 시절 상대적으로 김수영이 구휼을 위해 내놓은 2백원이 얼마나 큰 금액인지 알 수 있다.
1926년 봄에 양양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1925년 7월 전국적으로 두 차례 연거푸 큰 수해를 당해 사상자와 이재민이 전례 없이 많이 발생했다. 양양도 수해 피해를 입은 것으로 확인된다. 1925년 11월 16일자 동아일보에는 양양군 서면 조개리(早開里) 산간벽촌 마을은 조박과 죽으로 생활하는데 금년에는 수재와 풍재의 영향으로 기근을 못 이겨 북간도 방면으로 유리(流離)하여 가는 집이 열두 가구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같은 시기 양양에서 수해로 피해를 본 소작을 3,4할 깎아주었다는 미담기사도 있다.
김수영은 빈민구제를 하던 1925년 56세였다는데, 출생과 성장은 물론 언제 사망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혹시 1933년 신흥사에서 세운 김수영 공적기념비는 사후에 세운 것은 아닐까?
제주도에서는 조선 정조 때 흉년이 들자 모든 재산을 털어 굶어죽는 백성을 살린 거상 김만덕을 기념하는 사업회가 해마다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그 정도는 아니어도 우리 지역에도 이렇게 나눔 실천을 했던 여성이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비구니 김수영에 대해 더 많은 관심과 연구가 뒤따르면 좋겠다.
엄경선 / 설악닷컴 대표
*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신흥사 부도군에 있는 비구니 김수영 공적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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