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봉재 화백은 어린 시절 유복한 가정의 막내였다. 그의 부친은 영화를 좋아했는데 거의 매일 자신의 막내아들, 정봉재 작가를 데리고 영화관에 갔다. 정 작가는 자신의 상상력이 아마도 어린 시절 영화를 많이 본 것에서 비롯된 것 같다고 했다. 정 작가는 막내라서 어린 시절 혼자서 노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럴 때면 상상의 날개를 펴고 기분 좋은 생각들을 이어나갔다. 아마도 어릴 적 이런 경험도 작가의 사고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는 고교 시절에 미술을 자신의 진로로 정하고 세계 최고의 미술가가 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품었다. 이러한 꿈을 가진 그는 당시 고등학생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한 화가로부터 화실을 인수해서 친구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며 미술 공부를 했다. 화실 인수 과정에서 어머니의 도움이 있었지만 고등학생이 화실을 인수한다는 생각을 한 것이 꽤 특이해 보인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예비고사를 본 이후에는 서울의 미술학원에서 숙식을 제공받으면서 일을 하며 미술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기까지의 과정도 흥미로운 점이 있다. 생판 모르는 미술학원들을 무작정 찾아가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는데, 한 열 번째쯤 들른 곳에서 서양화가 차일만 작가를 만나 허락을 받았다. 정 작가가 고등학생일 때 운영하던 화실에는 이따금씩 기성 화가들이 호기심에 들르기도 했는데 그때 만났던 차일만 작가를 서울에서 그렇게 우연히 다시 만났던 것이다.
1980년, 정 작가는 대구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대학 입학 후 그림을 실컷 그릴 수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그는 언제나 수업이 끝나면 학교에 남아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며 살아가던 5월 어느 날이었다.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고 군인들이 교문을 막고 서서 학생들의 진입을 통제했다. 그림을 너무도 그리고 싶은 정 작가는 이게 도대체 뭔가 싶었다. 작가의 대학 때 일기에는 그림을 그리지 못해 초조해하는 심정들이 담겨 있다고 한다. 창작활동을 막아서는 현실을 마주하자 그는 자연스럽게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이러한 면은 이후 그의 작품에도 반영된다.
속초 최초의 입시미술학원 열어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속초로 온 후 속초 최초의 입시미술학원을 열었다. 학생을 가르치는 일은 그의 적성에 잘 맞았고 학원 운영은 원활했다. 학생들은 각종 실기대회를 휩쓸었고 서울대, 홍익대 같은 미술 명문으로 진학하는 경우도 많았다. 처음 속초에 미술학원을 열 때는 잠깐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유학을 가겠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관두자고 하니 학생들 생각에 쉽게 관두기 힘들었다. 당시 그는 수강생들이 언제라도 학원을 찾아올 수 있도록 밤늦게까지 학원을 지키며 문을 열어 두고 있었고 수강료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학생도 즐거운 마음으로 가르쳤다. 어떤 학생들은 학원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학원에서만 있으려고 했고 수강생들 간의 단합도 잘돼 자기들끼리 전시회를 열기도 할 정도였다. 정 작가는 그때 가르치던 학생들과 지금도 연락을 하고 있다. 학원은 10년 정도 운영했는데, 후배 겸 제자들이 다시 속초로 돌아오면서 후배들과 경쟁하지 않기 위해 문을 닫았다.
그런데 그가 학원을 운영하는 동안은 수강생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단절된 시간이었다. 언제나 학원에 머물며 밤늦도록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의 작품 활동에 몰두하다 보니 여타의 사회생활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청년 시절 경험 반영된 작품들
1980년대에 만들어진 작가의 작품에는 그의 경험들이 잘 반영돼 있다. 1986년 대한민국미술대전 입선 작품을 보면 한 사람이 손으로 햇빛을 가리고 있다. 그러나 햇빛은 그의 온몸을 비추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의 그림자가 이상하다. 그림자는 뒤돌아서서 땅을 향해 무언가 소리치는 듯 보인다. 주택가가 원경을 이루고 있고 사람 앞에 큰 우산이 둥둥 떠 있다. 이 작품은 80년 5월 광주에 관한 것이다. 손바닥이나 우산으로도 해를 가릴 수 없듯이 진실은 가려지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았다. 뒤돌아 선 채로 무언가를 외치는 그림자의 모습은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억압된 사람들의 울분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림은 전체적으로 우울한 느낌이다.
또 다른 작품은 군복을 입은 전두환 장군의 거수경례 모습을 담은 신문이 보이고 그 위엔 눈을 감거나 붕대를 두른 두상들이 놓여 있다. 그리고 피처럼 붉은 물감이 뿌려져 있어 약간은 섬뜩한 느낌을 나타낸다. 이 역시 5월 광주에 관한 것이다.
“예전에는 충격적으로 보이는 작품들을 많이 했지요. 한복을 입은 이가 목을 맨 것처럼 보이는 작품을 한 적도 있어요. 그런 작품들을 방 안에 두니 당시 어머니께서 제 방에 오기 싫어하실 정도였어요.”
정 작가는 자신의 청년 시절 작품에 대해 스스로 이렇게 평가했다.
그리고 이 시기의 다른 작품들은 충격적이진 않더라도 어두운 느낌을 전달하는 경우가 제법 된다. 이들 작품에는 외롭고 쓸쓸하거나 무기력해 보이는 요소들이 많이 등장한다. 넒은 공간에 왜소한 이가 서 있다. 그의 그림자는 매우 거대하다. 다른 그림에서는 어두운 도시를 배경으로 어떤 한 건물의 창문이 열려 있다. 사람이 보이지 않아 뭔가 스산하다. 한 조소 작품은 고개를 숙이고 슬프게 걸어가는 구도자처럼 보인다. 아마도 이 작품들에는 미술학원을 운영하며 느꼈던 고립감이 반영됐을 것이다.
“당시에는 제 작품들이 직선적이었고 어찌 보면 폭력적이었던 것 같네요. 요즘은 저의 방식이 그때와는 다르죠. 같은 것을 표현하더라도 부드럽게 순화하는 과정을 거치지요.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작품을 하려고 해왔어요.”
<다음에 계속>
이광호 객원기자 campin@hanmail.net
정봉재 화백
1986년 대한민국미술대전 입선작.
1986년작. 5·18과 전두환 정권을 다룬 작품.
무제(無題).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미술학원에만 머물던 시절에 그린 그림. 참고로 정봉재 작가는 대개의 경우 작품의 제목을 짓지 않는다. 제목을 붙이면 작품 해석에 있어 한계가 설정되기에 되도록 제목을 따로 짓지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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