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운터 포인트>가 현재와 조우하는 지점은 코러스이다. 코러스는 초기 그리스 비극에 많이 등장하여 작품의 극적 재미와 배경설명 등 다양한 역할을 하는 등장인물들. 이 작품에는 총 8명의 코러스가 등장한다. 역사의 나약한 피해자이자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는 민초의 모습을 코러스에서 만날 수 있다.
작품 팸플릿을 위한 스틸컷. 7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조국은 그를 반기지 않았다. 사진 위는 소현세자 역의 박문수, 아래는 인조역의 석경환 배우이다.
배우만 21명. 속초의 3개 극단 배우가 강원연극제를 위해 한 무대에 선다. 쉬운 일이 아니다. 연기의 내공과 연령의 차이, 연극 제작의 습관을 모두 조율해야 가능하다. ‘나’를 버리고 ‘함께’를 선택하는 순간의 피곤함은 경험한 자만이 알 수 있는 불안을 안고 있다.
속초는 지난해 극단 ‘파람불’이 <전명출 평전>(연출 변유정)으로 전국연극제 대상을 받았다. 한 극단이 전국연극제에서 두 번 대상을 수상한 일이 처음이라고 한다. 그런데 올해는 더 강한 도전을 시도했다. 극단 ‘파람불’, ‘소울시어터’, ‘청봉’이 함께 연합하여 작품을 만든다.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난해의 좋은 결과를 넘어서는 성과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유정 연출의 선택이 희생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해야 본전, 누가 봐도 밑지는 장사다. 극단들은 어떤가. 작품 제작에 한정한다면, 극단 ‘파람불’은 아쉬울 것 없는 극단이다. 혼자서도 잘할 수 있다. 젊은 에너지가 좋은 ‘소울시어터’는 형님들과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근성 강한 토종 극단 ‘청봉’의 연극인들도 마찬가지다.
불가능에 도전, 3개극단 연합 무대
이 모든 불가능한 도전을 성사시킨 이가 전 속초예총 회장이자 극작가 이반이다.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넘치는 열정을 가진 속초의 연극인들에게 희망의 씨앗을 심어주고 싶었다고 한다. 현역의 에너지를 가진 원로의 희망에 후배들이 답을 한 셈이다.
속초연극협회 남상진 회장은 속초 연합팀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지난해 가을부터였다고 한다. 가을, 속초연극의 최대 결실이라고 할 수 있는 전국연극제 대상 수상의 영광이 서서히 잊혀진 계절이었다. 소극장은커녕 제대로 된 연습실 하나 없는 ‘비극’적인 현실에 축복처럼 다가온 대상 수상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현실은 변하지 않았고, 봄을 준비해야 했다. 속초연합팀의 결성은 공연예술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는 지역인프라에 대한 연극인 나름의 항변은 아닐까.
“속초연극은 70년대 말에 결성된 청년문화연구회의 연극분과에서 출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결코 짧지 않은 세월동안 청년은 원로가 되었고, 새로운 청년들이 지역에서 문화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현재, 관광이나 체육에 비해 푸대접을 받고 있지만 지역발전의 보이지 않는 손이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과와 관계없이 이런 열정이 대접받는 시절이 오길 바랍니다.” 남상진 회장의 한숨 섞인 토로다. 21명의 인원이 연습할 곳을 찾아 도문농요전수관과 종합사회복지관 강당을 전전해야 하는 현실은 현재진형이기 때문이다.
속초연합팀이 올해 공연할 작품은 <카운터 포인트 - 소현세자, 흔적과 표적>으로 극작가 이반의 작품이다. 16세기 근대의 여명을 앞둔 국제정세 속에서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갈등한 인조와 소현세자의 비극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가 이반은 소현세자의 비극에서 인류 최초 비극의 주인공 아가멤논을 본다. 아가멤논은 에스킬러스의 오레스테스 3부작 중 하나로 그리스연합군을 이끌고 트로이와 전쟁을 한 후 7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고국에선 아내 클리템네스트라가 아가멤논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는 이야기다. 청나라 볼모로 간 후 근대화의 꿈을 키우고 9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2달 후 의문의 죽음을 당한 소현세자의 비극이 자연스레 오버랩된다.
배우와 코러스의 합, 그 신생의 에너지
우리가 익힐 알고 있는 역사의 비극은 어떻게 무대에서 그려질까. 연출을 맡은 변유정씨는 배우들의 합(合변)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고 설명한다.
“이반 선생님의 희곡은 코러스가 등장한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에요. 상황극이나 스토리라인보다 배우들이 무대에서 보여주는 동선과 에너지가 코러스의 시적인 운율과 만날 때 비극의 전율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다고 역사극 특유의 현재성을 놓치지도 않는다. “코러스는 민중의 목소리라고 할 수 있어요. 생각이 다른 두 인물과 권력에 대한 민중의 목소리가 극을 이끄는 중심입니다.” 변유정은 오랜만에 만나는 정통연극의 힘을 느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배우들에게도 이번 연합공연은 독특한 체험이다. 극단 '파람불' 대표이자 인조역을 맡은 석경환 대표는 "처음에는 서로의 차이에 대한 두려움이 강했지만, 새로운 형식, 새로운 시도에 대한 흥분과 에너지의 공유가 더욱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배우의 면면을 보면 반가운 얼굴도 있다. 극단 굴렁쇠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다 인제로 거처를 옮긴 추예인(세자빈 역)씨도 있다. 중국 훈춘의 예술단 소속으로 활동하다 이번 작품을 위해 청나라 왕 홍타이지 역을 맡는 최덕춘씨도 눈길을 끈다.
속초 연극계의 원로 이반이 극을 쓰고 예술감독을 맡은 작품, 역대급 배우들의 협력, 이미 그 실력을 인정받은 변유정 연출과 스텝. 속초 연극의 힘을 만날 수 있는 이 작품은 4월 9일 횡성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결과는 알 수 없지만, 중요치도 않다. 지난 70년대말부터 시작한 속초연극의 새로운 전기가 2016년 마련되고 있음을 우리 모두 알기 때문이다. 올해 가을에는 연습실과 소극장의 밑그림이 그려지기 바란다.
김인섭 속초문화원 사무국장
*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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