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자택을 처음 방문한 것은 아직도 추위가 다 가시지 않은 3월 중순이었다. 정봉재 화백에겐 대포동에 별도의 작업실이 있지만 정 화백은 집에서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다며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작가의 자택에 들어서자 그곳은 일상생활보다는 창작활동에 초점을 둔 곳으로 보였다. 입구에서 거실로 이어지는 한쪽 벽면은 작품들로 가득했고 집의 대부분이 창작 활동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거실에는 커다란 책상에 컴퓨터 모니터 세 대가 놓여 있었고 그림을 그리는 용도로 활용되는 작은 수첩과 팔레트 역시 책상 위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책상 옆에는 비디오카메라가 삼각대에 장착돼 있었고 주방에도 이젤과 컴퓨터가 있었다. 거실과 주방은 바로 붙어 있었지만 작가의 창작 욕구를 잠시라도 꺼트리지 않기 위한 공간 배치로 비춰졌다.
날씨 탓인지 집 내부가 전체적으로 어두웠는데 책상이 놓인 주변에는 10여 개의 조명기구들이 천장과 벽면에 배치되어 직접 혹은 간접으로 책상을 비추고 있었다. 그 모양새가 책상을 마치 연극의 무대처럼 보이게 했다. 책상 앞에 앉은 정 화백은 모노드라마를 공연하고 있는 배우처럼 보였다.
‘주역의 괘상론과 표현예술’로 석사학위
방문객을 맞이한 작가의 모습에서는 한눈에도 예술가와 마주한 인상을 강하게 받을 수 있었다. 그날따라 작가의 눈빛에는 우수가 강하게 어려 있었는데 그 모습이 정 화백을 강렬하게 감성적인 사람으로 느끼게 했다. 정 작가는 연배에 비해 젊은 감성으로 이야기를 풀어갔는데 10살 이상 젊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정봉재 작가와 대화를 하는 동안 약간 놀랐다. 정 화백은 아주 많은 나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제 환갑을 바라보고 있으며 현재 속초예총의 회장을 맡고 있다. 연륜과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이면 대개 자신도 모르게 거만하게 행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정 화백은 그런 것과는 확연히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주관과 소신은 분명하게 표현했지만 부드러운 어조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부드러운 말투 속에서 가끔씩 내비치는 주관과 소신은 정 화백이 진실함이 없이 겉핥기로 아무에게나 마냥 좋은 말만 하고 넘어가는 사람 또한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 줬다. 작가는 상대의 말을 자르지 않고 끝까지 들으며 자신의 생각을 차분히 설명했다. 작가의 이런 모습은 그의 젊은 감각과 함께 사람을 살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위와 같은 모습들이 종합적으로 정 화백에게서 언제나 새로운 감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려는 예술가의 이미지를 전해줬다.
작가와의 대화는 철학에 대한 얘기로 시작했다. 정봉재 화백은 2013년에 강원대 철학과에서 석사 과정을 이수하고 ‘주역의 괘상론과 표현예술’이란 논문을 제출하여 석사학위를 받은 바 있다. 정 화백은 자신이 쓴 논문의 내용과 논문을 준비하던 과정에 대해 얘기를 들려줬다. 미술가와의 대화가 철학으로 시작하는 것은 생소하지만 신선한 자극이었다.
정 화백은 석사 논문에서 주역철학의 저변에 깔린 예술정신이 생명 사랑이라고 짚었고 겸재 정선의 작품에서 주역의 철학적 성격과 음양 원리를 살폈다. 그리고 결어에서는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오늘날은 디지털 기술까지도, 그 중에서도 컴퓨터 그래픽까지도 예술에 가세하였다. …… ‘이런 것들이 예술이 된다’는 통념도 무용(無用)해지기까지 이르렀다. …… 개성 있게 표현한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그려낸 선이나 모양을 예술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예술은 ‘모양’이 아니라 ‘정신’에 있는 것이다. …… 그 안에는 작가가 지향하는 목표가 담겨야 하고, 시대와 교감하는 정신이 담겨 있어야 한다. …… 작품을 구성하는 한 획에는 예술 작품에 대한 태도, 변하지 않는 생명 사랑인 ‘인(仁)’의 ‘도(道)’가 작가의 정신에 담겨야 할 것이다.”
‘시대와 교감하는 정신’, ‘생명 사랑’이란 표현에서 작가가 작업을 하면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엿볼 수 있다. 물론 막연하게 좋은 말을 던지고 실제 삶 속에서 자신의 말을 배반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후술하겠지만 작가의 작업에서는 자신이 위 논문에서 던졌던 말을 구현하기 위한 노력들을 관찰할 수 있다.
정 화백은 첫 번째 취재에서 자신의 성장과정과 작품세계, 예술관, 지역 미술계와 속초예총에 관한 견해 등 다양한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인터뷰가 시작된 것은 점심시간이 갓 지난 때였지만 인터뷰를 마친 것은 저녁식사 시간을 넘긴 후였다. 원래 준비했던 질문을 다 마무리하지 못한 채였다. 1인 관객을 위한 정 화백의 모노드라마는 그 긴 시간 동안 지루할 틈도 없이 묘하게 흥미로웠다.
자택 발코니 창문은 거대한 캔버스
정 화백의 자택을 다시 방문한 것은 그로부터 3개월 후인 6월 말이었다. 그 사이 작가는 이사를 했고 새롭게 마련한 공간은 이전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이전 집이 약간 어두운 편이었다면 이사 온 곳은 밝은 느낌이었다. 그날은 날이 좋기도 했지만 아파트의 맨 끝 층이라 별도의 조명을 켜지 않아도 거실까지 환했다.
발코니의 경치는 특별하게 다가왔다. 설악산 울산바위와 영랑호, 동해가 한눈에 들어왔다. 속초가 자랑하는 산, 호수, 바다가 집에서 한꺼번에 보이는 것이다. 발코니의 창문은 거대한 캔버스였다. 하늘색과 녹색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저 아래 밭들과 드문드문 있는 작은 집들은 장대한 풍경에 정감어린 정취를 더했다. 그곳에서 바깥 경치를 매일 보노라면 애향심과 예술적 감수성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 화백은 경치 얘기를 하며 전날 석양을 촬영한 동영상을 보여줬다. 아름다운 광경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어 하는 모습이 꿈 많고 순수한 소년 같아 보였다.
작업실로 쓰는 공간은 여전히 다른 공간보다 어두웠다. 아마도 밤이 되면 이전에 처음 방문했을 때 봤던 작업공간과 비슷한 분위기가 연출될 것 같았다.
<다음에 계속>
이광호 객원기자 campin@hanmail.net
■정봉재
-영남대 조소학과 학사
-강원대 철학과 석사
-신라미술대상전(1984)
-대한민국미술대전 입선(1986)
-GAF 2012 – 특별전
-강원미술대전 초대추천작가전
-강원도·돗토리현 한일교류전
-속초예총 회장
-강원도예총 부회장
-강원도 미술협회 감사
-영남조각회 회원
정봉재 속초예총 회장
주방에 놓인 이젤과 컴퓨터.
정봉재 회장의 작업 공간. 여러 개의 조명들이 배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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