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군엔 우리나라의 대 사상가들이 머물면서 생각을 가다듬은 곳이 있다.
대표적인 곳이 왕곡마을이다. 이곳에서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이 1889년 포교활동을 하고 동학혁명 당시 관군을 피해 함일순 가옥에서 지내며 전력을 재정비했다. 왕곡마을 입구엔 ‘동학의 빛 왕곡마을’이란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씨알의 소리’로 대표되는 고 함석헌(1901~1989) 선생이 1950~60년대 밭을 일구며 사상을 가다듬은 곳도 바로 진부령 안흘리 안반덕이다. 지금도 마을사람들은 씨알학원을 씨올학원으로 발음한다. ‘씨알’의 ‘알’이 ‘아래 아’ 점이 찍혀있어 씨올로 발음한 것이다.
이렇듯 고성군엔 발굴해 엮을 보석 같은 인문학적 관광지가 있지만 그 보석을 그냥 땅에만 묻어두고 있는 형국이라 너무나 아쉽다.
씨알학원·씨알농장·통나무집 자리는
이반(극작가, 전 숭실대 교수) 전 속초예총 회장 부부와 고성 오봉교회 장석근 목사 일행은 지난 22일 오후 고성군 진부령 안흘리에 있는 씨알학원과 씨알농장, 안반덕의 흔적을 찾았다. 차가 용대리를 지나니 황태축제가 한창이었다. 진부령에서 알프스리조트 쪽으로 들어서니 도로 주변에 폐점한 스키 대여점들이 즐비해 황량함이 그지없었다. 밖흘리를 지나 중흘리로 들어서니 장 목사는 고 주수원 목사가 집도한 옛 예수교회로 안내했다. 외관상 교회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검소한 이 교회건물에 들어가 보니 거의 폐허에 가까울 정도로 방치돼있었다. 우뚝 선 전나무가 그 위용을 뽐내고 있을 뿐,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기라도 하는듯했다.
안흘리 쪽으로 방향을 잡고 안반덕으로 향했다. 해발 800m의 산은 벌목으로 벌거숭이였다. 산림청이 목재 수급을 위해 50~60년은 족히 넘었을 수령의 나무를 벌목 후 새로운 나무를 식재했다. 안반덕 일대도 피망 재배 비닐하우스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폐허가 된 축사가 옛 씨알농장의 이야기를 대변하는 듯하다.
안반덕을 내려오면서 동해바다가 보이는 곳에 통나무집을 지었다는 곳을 들렀다. 날이 흐려 오봉산만 보였지만 맑은 날 동해바다가 또렷이 보일 것 같은 명당이었다. 내려오는 길에 씨알학원 터를 보니 남향으로 이 또한 명당으로 보인다. 이 터에서 기와와 살림살이가 출토된다고 이 터 앞에서 사과 과수원을 하는 주민이 증언했다.
“어떻게 이런 역사가 가능할까”
이반 전 회장이 기독교 계간지 <성서와 문화> 2017년 여름호에 게재한‘진부령 언저리에서’란 제목의 기고에서“어떻게 이런 역사가 가능할까? 전쟁이 멈춰선지 몇 년이 되지 않은 때에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던 금강산 남쪽 자락에 기도처가 마련되고, 그것에서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는 기도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렸을까? 진부령은 38선에서 1백50리를 북상해야 이룰 수 있는 곳이다. 북한 군인들과 중공군들은 금강산을 사수하기 위해 총력을 다 하고 국군과 미군들은 금강산을 점령하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전쟁터인데, 그 전쟁터 향로봉 아래 분지에 농장을 세울 용기를 내었을까?”라며 “숲속 후미진 곳에 아직 땅속으로 찾아들지 못한 시신들이 엉켜있고 피아간에 묻어놓은 지뢰가 제거되지 않은 터전에 농기계도 제대로 없는 젊은이들이 농장을 꾸밀 생각을 했을까? 사람이 살 통나무집이 지어지고, 가축들이 기거할 축사도 세워졌다. 관대바위 아래의 화전민촌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난민들이 판잣집이나 움막을 짓고 화전을 일구고 있었다. 원산 남쪽 고을‘통천’이나 북고성에서 화력이 상대적으로 강한 남한의 포화를 피해, 남쪽으로 피난 나온 피난민들이 화전을 일구며 살던 곳이 ‘관대’마을인데, 학교에 가지도 다니지도 못하는 어린이들이 1백명도 넘게 몰려다니고 있었다”고 했다.
또“남자도 아니고 나약한 여성의 몸으로 봉사정신 하나로 학교를 세우고 아이들을 불러 모아 학원을 차렸다. 소식을 들은 도지사(박경원씨일 듯)가 교사를 건축하는데 필요한 건축 자재를 기부했다. 이화여대 졸업생들은 학원에 필요한 물품과 학용품을 보내주기도 했다. 그러나 도움의 손길은 언제나 부족한 편이었다. 이화여대 졸업생들은 자선바자회도 여러 번 주관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안반덕의 의미를 전했다. “어떻게 이런 역사가 이뤄졌을까?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물음은 끊이질 않는다. 휴전 후 진부령 일대의 역사는 기독교 이상주의자들에 의해 이뤄졌다는 결론에 이른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그 시대의 문화에 대해 알게 된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은 타계하고 그들의 진실과 이상만 전해지고 있다. 이야기 그물 속의 물건을 뒤지니 자유, 민주화, 평화, 믿음, 꿈과 같은 지고한 가치의 구슬이 연결되어 나온다. 역사가 힘과 권력에 있다면 문학이나 이야기는 삶의 모습이나 역사 뒤편에서 사라져간 서민들의 생이 반영돼 나타나는 것 같다. 그래서 리얼리티가 없다고 하지만 삶보다 더 진실한 꿈, 이상이 담겨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진부령 언저리의 기독교 이상주의자들의 행적은 몇 번이고 계속될 것 같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코넬대 의대 부교수로 있는 김해암 교수는 지난 2014년 재미 남가주 서울대 동문회보에 진부령 안반덕을 다녀와 쓴 수필에서 “함석헌 선생은 젊어서부터 산을 좋아하셨고 일본 유학에서 돌아오신 후 당시 서양에서 유행하던‘고독과 산보’의 영향이었는지 고향의 산을 잘 타시고 명상을 하셨다고 했다”고 회상했다. 이수영 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농기계도 제대로 없는 젊은이들이 안반덕에 들어와 씨알농장을 세우고 통나무집과 축사, 양철로 만든 축사관리동을 만들어 화전을 일구었다. 안반덕 모습.
씨알학교가 있었던 부지.
안반덕의 오래된 축사.
함석헌 옹이 묵었다는 통나무집 조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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