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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의 음식생활사<7>
조선시대 기행문에 나오는 해산별미
등록날짜 [ 2018년05월08일 16시34분 ]

조선시대 옛 기록에서 속초지역의 음식을 언급한 기록을 찾기가 쉽지 않다. 다행히도 금강산 인근 지역이라 금강산을 다녀간 문인들이 남긴 기행문에는 양양과 고성지역에서 먹었던 음식과 주민들의 생활에 대한 언급이 몇 구절 나온다.
1553년(명종 8년) 금강산 등 관동지방을 유람한 홍인우가 쓴 <관동록>에는 고성의 바닷가에서 먹은 음식에 대해 짧게 언급하고 있다. 1553년 4월 9일 금강산 유람을 떠난 홍인우는 그달 29일 금강산에서 고성군으로 이동했다. 홍인우 일행은 고성 영진곳(靈律串) 어부의 가게에서 머무르면서 밥을 먹었다고 했다. 어부가 살아있는 전복과 문어, 바닷조개 등을 가지고 왔는데, 점심으로 충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홍인우는 남쪽으로 내려와 남강과 명파역, 열산현의 화진포를 거쳐 간성군의 민가에 여장을 풀었다. 5월 2일 아침이 되자 간성군수 김사문(金斯文)이 초청해 관아에 들르고, 다시 여행길에 올라 선유담과 능파도를 지나 청간역에 이르렀다. 여기서 홍인우는 “해부(海夫) 네댓 명이 천 길 파도 속을 들락날락 하면서 전복을 채취하고 있었다. 이는 바로 김사문(金斯文)이 우리를 대접하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라고 기록했다. 어부들이 깊은 물 속에서 따온 ‘전복’이 간성군수가 특별히 손님들에게 접대하기 위해 준비한 음식이었다.  
 
전복은 회 치고, 대구는 삶고
1740년(영조 16년) 채지홍은 지인이 고성군수로 지낼 때 동료들과 평생의 소원인 금강산을 유람하자고 길을 나섰다. 그 여행기를 <동정기>로 남겼다. 채지홍 일행은 그해 2월 17일 여행을 떠나 원주와 평창, 강릉을 거쳐 동해안 해안가를 따라 올라갔다. 2월 25일 채지홍 일행은 연곡역을 지나 양양으로 들어왔다. 이때 나루사람들이 바다 반찬을 장만해 가져왔다. 기행문에는 “해삼, 조개, 연어, 방어, 대구, 팔초 등 서남 지방에는 없는 것들이다. 광어와 판어(板魚)를 다 가자미(鰈)라고 부른다. 이것은 중국에는 없다. 삶고 구우니 눈이 배불러 입이 먼저 물린다”고 기록했다. 팔초(八稍)는 문어를 뜻한다.
채지홍보다 앞서 금강산을 유람한 윤휴의 유람기에도 우리 지역의 음식과 생활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조선 후기 문인 윤휴는 1672년(현종 13년) 7월부터 지인들과 함께 금강산을 비롯한 관동지방을 기행하고는 <풍악록>이라는 기행문을 남겼다. 음력 7월 24일 출발한 윤휴 일행은 금강산 유람을 마치고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간성군에 들렀다. 8월 12일 낮에는 청간정 만경대에 올라 바다를 구경했다. 인근에는 1백호 정도 되는 어민들이 살고 있었고 배는 끊임없이 오가고 있었다. 어부들이 새로 따온 전복과 대구를 윤휴 일행에게 제공해 주어, 전복은 회를 치고, 대구는 삶고, 또 막걸리까지 사다가 흥풀이를 했다.
 
뱃노래 가사가 모두 바람 걱정 물 걱정
윤휴 일행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달빛어린 포구에 배를 띄우고 섬바위 위에 앉아 어부에게 뱃노래를 시켜 듣고 있는데, 그 가사가 모두 바람 걱정 물 걱정하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어부는 “고기잡이배가 아침에 나갔으면 반드시 저녁에 돌아와야지, 만약 그날 돌아오지 않는 날이면 식구들이 죽은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며, “바다에 나가 죽어간 자들이 많아 뱃사람으로서 정작 늙어 죽은 자는 오히려 적은 편”이라고 답했다.
 “그렇게 험한 바다 일을 왜 생업으로 삼느냐”는 질문에, 어부는 “바닷가에 사는 백성들은 먹고 사는 길이 이것 뿐”이라며, “관가로부터의 요구에 응해야 하기에 비록 죽임이 닥쳐올 것을 알고서도 별 수 없이 해야만 한다”고 답했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24년 4월 7일 강원도 암행어사 권준이 임금께 올린 장계를 보면, 간성에서 어부 88인이 정월 11일 바다로 나갔다가 폭풍을 만나 한꺼번에 침몰되어 실종되었으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해 조정에 장계도 올리지 못하고 휼전도 지급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아울러 아비 잃은 어린 자식과 남편 잃은 홀어미가 소리를 삼켜가며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울어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다고 했다.
조선시대에도 동해안에서 나는 해산물은 탐방객들에게는 별미 음식이었다. 그래서 전복과 대구, 연어, 문어, 해삼, 조개, 방어 등이 지역을 찾는 손님을 접대하는 귀한 음식으로 손꼽혔다. 하지만 해산물을 마련하기 위해 지역의 어부들은 목숨을 걸고 바다로 나가야 했다.
선박이 대형화되고 현대화된 지금도 역시 해난사고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하물며 작은 조각배 하나에 의지해 험한 파도에 맞서면서 어로작업을 해야 했던 그 옛날 동해안 어부들의 삶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저승에서 벌어서 이승에서 먹고 산다거나, 바다에 나가면 판자 아래 저승이라는 이야기가 헛말은 아니다. 

엄경선 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설악신문 (soraknews@soraknews.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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