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호 씨는 용인에 정착한 지 이틀 후에 직장을 구했다. 밥상을 사러 중고용품점에 갔는데 이삿짐센터 사람들을 만났고 그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다 함께 일하게 됐다. 이삿짐센터 일은 박 씨가 살림을 장만하는 데 유용했다. 이불, 컴퓨터, 가구 등 사람들이 이사를 가면서 버리는 가구들을 박 씨가 가져가서 집의 빈 공간을 채웠다. 그리고 한편으로 박 씨는 자신이 이삿짐센터를 자영업으로 할 수 있을지 가늠하며 배운다는 자세로 열심히 일했다.
머구리 일하며 많은 수입 올려
몇 달 후 박 씨는 새로운 직장에 스카우트됐다. 가구점 사장이 박 씨에게 일을 제안했다. 가구 배송·설치는 이삿짐센터 일과 비슷했다. 하지만 이 일 역시 오래 가지 못했다. 이후에는 아파트 건설현장, 그리고 축산농장에서 몇 달씩 일을 이어갔다. 박 씨는 자신의 일을 찾기 위해 전국을 누볐다. 아주 잠시였지만 제주도에 가서 유자망 어선을 탄 적도 있다. 그러다 그는 고성 아야진에서 머구리 일을 할 수 있는 곳을 알게 됐다. 그때가 2008년 초였다. 그곳에서는 두 달 정도 있었는데 그 사이 어장이 더 큰 대진에서 머구리 자리가 나 드디어 대진항에 정착하게 됐다. 전국을 돌고 돌아 강원도 고성 대진항으로 오게 된 것이다. 2006년 5월에 탈북했으니 2년 만에 그는 자신의 일을 찾은 것이다. 혹자는 참 오래 걸렸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다른 탈북자들과 비교하면 박 씨는 자신의 거처를 빨리 찾은 편이다. 안타깝게도 남녀를 불문하고 탈북자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박명호 씨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려도 저임금 장시간 노동의 열악한 일자리를 전전한다.
그런데 박 씨가 가족들과 함께 대진으로 이사하려는데 문제가 있었다. 고성 대진리로 이사하기 위해 임대아파트를 떠나려는데 임대기간이 끝나지 않았다며 반납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대진에서 임대한 집이 있음에도 용인의 임대아파트 월세를 고스란히 다 부담할 수밖에 없었다. 탈북자를 배려하기 위한 임대아파트가 오히려 박 씨에게 경제적 부담을 준 것이다.
한편 박 씨는 대진으로 이사를 하면서 두 아들을 안성의 한겨레중고등학교에 다니게 했다. 한겨레중고는 탈북 청소년을 위한 학교로 그의 두 아들은 그 이전에는 용인의 일반 중등학교를 다녔다. 처음 아들들이 용인에서 학교를 다닐 때는 북한에서 온 것을 숨겼다. 그러나 곧 그 학교 학생들이 탈북 사실을 알게 되자 박 씨의 아들들은 동정 혹은 희화화의 대상이 됐다. 인근 9개 아파트 단지 중 자신들이 거주하는 8단지만 임대인데다가 임대아파트는 다른 아파트와는 출입시스템도 달라 이런 것도 아이들을 위축시키는 요소였다.
그러나 한겨레중고는 탈북이라는 동질성을 가진 아이들이 함께 있어서 박 씨의 아들들도 이내 활기를 찾았다. 그뿐만 아니라 한겨레중고는 박 씨 부부의 남쪽 사회 정착에도 큰 도움이 됐다. 박명호 씨가 대진에 오기 전까지 그의 일터는 자주 바뀌었고 여기에 더해 박 씨의 아내도 생업전선에 나선 관계로 자식 교육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한겨레중고는 의복과 식사, 기숙사까지 무료였고 학생들에게 별도의 과외 학습을 시켜주었다. 이렇게 아이들 교육 문제가 해결되자 박 씨는 자신의 일에 더욱 열중할 수 있었다.
머구리 일은 박명호 씨가 한 다른 일들보다 고수익이었다. 하루에 채취한 해산물의 판매액 중에서 45%가 자신의 몫이었다. 그리고 머구리 일은 갑을관계가 특이해서 잠수부가 선주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상황이라 이 점도 그에겐 매력적인 요소였다.
박 씨는 월급을 받으며 머구리 일을 하던 시절에는 한 달에 보통 20일 정도 일을 나갔다. 겨울에는 날씨가 안 좋은 날이 많아 그렇게 많이 나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거의 쉬는 날 없이 일했다. 머구리 일이 없는 날에는 그물에 잡힌 고기를 떼 주는 작업을 했고 또한 다른 이들이 위험해서 잘 하지 않는 일을 나서서 했다.
당시 그의 여름 수입은 지금의 대기업 부장보다 나은 정도였고 겨울에는 수입이 적었지만 당시의 노동자 평균임금 수준은 됐다. 여름에 급여가 높은 이유는 횟집 등에서 수요가 많아 해산물의 단가가 높아서 머구리의 월급도 높아지는 거였다.
집 사고 몇 달 뒤 배도 구입
그렇게 열심히 일한 결과 박 씨는 대진에 간 지 1년 반 만에 집을 살 수 있었다. 잠수 때마다 사선을 넘나든 노고의 결실이었다. 집을 살 때 대출을 받았지만 불과 몇 달 만에 빚을 다 갚았다. 집을 산 후 몇 달 뒤에 배도 샀다. 배를 살 때에는 아내의 반대가 심했다. 머구리 일만으로도 먹고 살 만했기에, 그리고 머구리이면서 사업을 하는 사람이 잘 없었기에 아내는 박 씨를 만류했다. 사업이란 게 쉽지 않은데 혹여 망할까봐 걱정을 많이 한 것이다. 특히 아내는 탈북자들이 사업을 하다가 거의 망한다는 얘기를 들어서인지 더욱 더 배를 못 사게 말렸다.
대진항에서 박 씨는 인기 있는 머구리였다. 선주들이 서로 데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박 씨가 선주가 되자 경쟁자가 새롭게 등장한 것이기에 당시 그를 경계하는 이들도 있었다. 선주가 되기 전에는 미처 예상 못한 일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선주가 된 초반에 약간의 어려움도 겪었다. 지금은 이러한 우여곡절들이 옛일이 됐다. 이제 그는 대진에서 지역의 일원으로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사실 박 씨는 고성에 오기 전에 다른 길을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가 북한 장교 출신이어서인지 그에게 공군 입대 제의가 들어 왔던 적이 있다. 이데올로기를 떠나서 군대라는 본질은 상명하복의 특성이 있는 것이기에 20년의 군 경력이 있는 그에겐 솔깃한 제안이었다. 아내도 입대를 적극 권유했다. 하지만 그는 보다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에 입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때 입대하지 않은 것이 잘한 결정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구술 박명호·정리 이광호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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