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지역이나 지역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장소가 있다. 부산은 자갈치시장과 국제시장, 보수동 책방골목, 40계단 문화관광테마거리가 그런 곳이다. 일제강점기 자갈마당을 매립하여 부산을 대표하는 수산시장으로 성장한 자갈치시장은 자갈치 아지매라는 고난극복의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해방 후 일본인이 버리고 간 물건의 유통에서 시작한 국제시장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국제적 수입물품의 유통공간으로 명성을 떨쳤다. 한국전쟁 당시 임시수도 부산에 피난민들이 몰려왔을 때 보수동 골목에서 헌잡지와 각종 헌책으로 노점을 시작한 후 다른 피난민들이 하나둘 가세하여 책방골목이 형성된 보수동 책방골목. 가난도 막지 못한 교육열이 헌책으로 대표되는 지식의 공유현장이 되어 다양한 서민애환의 스토리가 쓰인 장소가 되었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국내 유일의 헌책 거리로 명성을 떨치면서 부산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부산 중구청 평생교육축제와 함께 ‘보수동 책방골목 문화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대형서점과 온라인 서점에 맞서 인터넷 쇼핑몰을 만들고 책방 번영회를 만들어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젠트리피케이션’ 영향으로 임대료가 오르고 도서문화의 불황으로 어려움에 처해있다. 올해 중구청은 환경개선사업으로 주민이 머물고 쇼핑을 편하게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바꿀 예정이라고 한다. 서점 셔터에 개별 서점의 개성이 드러날 수 있도록 캘리그라피 작가들의 작품이 그려지고, 기존의 나무 계단은 과거의 모습으로 되돌려 돌계단 형태로 복원된다.
속초는 최근 전통의 ‘동아서점’과 ‘문우당 서점’, 서점과 게스트하우스를 겸한 ‘완벽한 날들’에서 다양한 인문학 행사가 개최된다. 서점 주인장의 독특한 큐레이션과 공간구성도 방문객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기존 도서관 3곳의 책읽는 행사와 연계하여 속초 특유의 ‘독서문화축제’를 개최할 수도 있지 않을까. 관광객을 위한 행사는 아니지만 지역 인문학 환경 조성에 의미가 있다. 이와 함께 칠성조선소 등 젊은 감각의 문화공간이 결합한다면 내용과 형식이 알찬 시민축제를 상상할 수도 있다. 보수동 책방거리처럼 책을 통해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고 지역의 역사를 복원하여 공간의 장소성과 문화적 가치를 높이는 작업이 필요하다.
실향 상징 ‘40계단 문화관광테마거리’
실향민의 애환을 문화관광거리로 조성한 곳도 있다. 중앙동 40계단 문화관광테마거리에 가면 피난살이의 애환을 상징하는 노래 ‘경상도 아가씨’가 흘러나오는 40계단 조형물을 만날 수 있다. 그 밑으로는 옛 부산역 자리를 상징하는 기찻길을 조성했고 어려운 시절의 서민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조형물이 포토존 역할을 하고 있다. 60년대 이후 인쇄골목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관공서가 떠나고 빈공간이 늘어나던 곳이 생활역사를 되살리는 테마거리로 조성된 것이다. 중앙동에는 또 다른 문화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부산 미술인들 중 선정된 일부 작가들에게 중앙동의 빈공간을 개인 작업실로 시범 운영하는 프로젝트 ‘또따또가’의 현장이다. 또따또가는 관용을 뜻하는 프랑스어 ‘똘레랑스’의 또, 따로 활동하지만 또 같이 활동하는 의미에 거리를 나타내는 한자 ‘가(街)’를 합성한 이름이다. 죽어가던 원도심 공간이 문화와 예술을 활용한 프로젝트를 통해 부활한 도시재생의 성공사례이다.
금강대교 밑 갯배 선착장은 과거 관광디자인 사업으로 실향마을의 문화적 특성을 살린 공간을 조성했다. 북청에서 건너온 사자놀음과 실향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사진을 부착했다. 하지만 전국에서 유일하게 이북 고향문화를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는 ‘아바이마을’의 삶을 전달하기에는 부족하다. 시민 삶의 문화예술적 복원을 시도하지 않고 단순한 환경조성 사업에 그쳤기 때문이다.
부산의 경우 공간조성 후부터 적은 예산이나마 ‘40계단 문화축제’를 꾸준히 개최하고 있다. 역사적 장소성의 의미를 환기하여 공간의 문화적 가치를 만들어가기 위한 방법으로 축제를 개최하는 것이다. 속초민예총은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갯배예술제’를 매년 개최하고 있지만, ‘아트플랫폼 갯배’ 조성 이후는 갯배 선착장에서 개최하지 않고 있다. 여전히 많은 관광객이 갯배를 타기 위해 줄을 서고 있지만 그곳의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방편은 마땅치 않다. 크루즈 어항과 가까운 갯배 선착장 인근을 우리 근대사와 시민의 삶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하는 비전이 필요하다.
버려진 공장의 재탄생 ‘F1963’
누군가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누구는 속초의 구 속초수협을 말했다. 칠이 벗겨진 옛 기둥을 새로운 철골이 받혀주고, 공간과 공간을 새롭게 연결하니 무대이자 광장이 조성되었다. 옛 고려제강의 공장부지를 기업이 문화적 리모델링을 하고 부산시가 문화재단과 함께 프로그램을 지원한 결과 ‘F1963’이 나왔다. F1963은 특수선재 글로벌 기업인 고려제강의 ‘키스와이어’(Kiswire)가 설립한 복합문화공간이다. 1963은 고려제강이 부산 수영구 망미동에 처음으로 공장을 지은 해로 F1963의 ‘F’는 ‘공장’(Factory)을 의미한다.
건축가 조병수는 공장부지 리노베이션을 하며 옛 공장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도록 했다. 지붕의 나무트러스는 벤치로, 바닥은 조경석과 디딤돌로 재탄생했다. 공간 콘셉트는 ‘네모 세 개’이다. 중앙의 첫 번째 네모는 음악회나 파티를 할 수 있는 공간, 두 번째 네모는 카페 테라로사와 수제막걸릿집 복순도가, 수제맥줏집 프라하 994같은 상업공간, 세 번째 네모는 예스24 중고서점과 전시장 등의 문화공간이다.
이제 산업화시대의 폐건물과 예술의 만남은 새로운 사건이 아니라 트렌드가 되었다. 이곳이 조금 더 특별한 것은 민간기업이 130억원이라는 돈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역사를 기억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여기에 부산시가 30억원의 돈을 들여 문화를 입혔고, 문화재단이 프로그램으로 채우고 있다.
구 속초수협, 청호동 오징어 할복장은 수산업 도시 속초의 산업현장이자 주민 생활의 흔적이 박석처럼 박혀있는 삶의 공간이다. 내 땅 한평 없이 속초라는 이방의 공간에서 맨몸으로 자신의 역사를 만든 어민들을 문화로 기억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F1963'은 의미와 가치를 새기는 공간의 조성이 중요한 관광자산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다음 호에 계속>
김인섭 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헌책을 매개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과 공간의 문화적 가치를 높이기 위한 사업이다. 1년에 한번 문화이벤트를 개최하고 여행자 센터 등의 거점공간을 조성한다. 주민과 상업공간, 행정의 유기적 협력에 대한 속초만의 고민이 필요하다.
40계단 문화관광테마거리는 실향의 애환이 있는 공간을 테마거리로 조성한 사업이다. 예술인에게 빈공간을 제공하는 ‘또따또가’와 함께 구도심의 문화적 재생사례로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속초의 거리조성은 공모사업을 위한 단기적 이벤트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로데오거리, 금강대교 밑 갯배 선착장 조성이 그렇다. 장기적인 전망의 문화적 재생은 주민 삶의 질을 높이고 정주성을 강화한다. 관광은 덤이다.
F1963. 산업은 변화하지만 문화는 쌓인다. 산업환경의 변화로 공장은 문을 닫고 낡아 가지만 그곳의 역사성은 문화적 가치로 환원될 수 있다. 구 속초수협, 청호동 오징어덕장을 비롯해 속초의 낡은 골목과 건축에 주목하자. 도시의 발전을 하드웨어의 개발에서만 찾지 말아야 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