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맛볼 수 없는 속초의 옛 음식을 거론하자면 순채를 들 수 있다. 만약 지금 설악권에서 복원해야할 옛 음식을 손꼽으라면 바로 이 순채로 만든 음식이 아닐까 싶다.
순채는 수련과에 속하는 다년생 수초로 잎과 줄기에 맑고 투명한 우무질이 두텁게 감싸고 있는 식물로 호수 표면에 뜬 잎은 연잎과 비슷하다. 순채는 남방계 식물로 우리나라 전역 호수나 연못에서 자생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전량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순채는 농약으로 오염되거나 더러운 물에는 살 수 없다. 해방 후에는 호수나 연못이 매립되거나 농약 등의 영향으로 대부분 사라졌다. 지금은 강원도 고성군과 제주도 등 10여 곳에서만 자생하고 있는데, 고성군 천진호가 순채 자생군락지로 남아 있다. 순채는 지금 멸종위기식물 2급으로 지정된 희귀식물이다.
- 오래전부터 즐겨먹던 ‘안빈낙도’ 음식
1994년부터 고성군 천진호에서는 자생하는 순채를 관리, 채취해 일본에 전량 수출하기도 했다. 그때는 이미 순채는 전국에서도 고성군 천진호와 전북 김제에서만 나오는 귀한 식물이 되었다. 마을 아낙들이 조각배에 올라 깨끗한 호수에 손을 담그고 고개를 들 틈도 없이 바삐 순채를 땄다. 순채의 수확시기는 6월부터 9월까지 천진호에서 하루에 1백50kg 가량 수확했다. 순채는 따내는 즉시 삶아서 상품으로 포장했다. 순채는 향기가 좋고 씹는 맛이 독특해 일본에서는 간장에 참기름과 겨자를 섞어 만든 양념에 찍어먹기도 한다. 2000년대 초까지도 고성 원암리 판매장에서 소량으로 판매하기도 했다. 판매장에서 오미자 끓인 물에 벌꿀과 순채를 넣은 순채차를 맛볼 수 있었다.
옛 선비들이 즐겨 인용하는 고사가 하나 있다. 중국 진(晉)나라의 장한(張翰)이 제왕에게 등용되어 벼슬을 했으나 가을바람이 불어오자 갑자기 고향 오중(吳中)의 순채국과 농어회가 생각나서 “인생살이에 있어서 뜻에 맞게 사는 것이 귀한 법인데, 어찌 벼슬에 얽매여서 수천리 밖을 떠돌면서 명예와 관작을 노리겠는가”라고 말하고는 수레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로 인해 순채의 순(蓴)과 농어의 농(鱸)을 따서 순로(蓴鱸)라는 말이 생겼는데, “벼슬을 버리고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순채국과 농어회. 이는 가난한 선비의 안빈낙도의 삶을 자족할 때 꼭 인용하는 음식으로 유명하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와 같은 맥락의 이야기이다.
당나라 시인 두보는 자신의 시에서 “誰與討蓴羹(수여토순갱), 누구와 같이 돌아와 순채국을 찾을까”라고 노래했다. <동국이상국집>을 지은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는 친구 집에서 순채를 먹고 쓴 한시에서 “오늘 순채를 먹으니 / 가늘고 가벼워 은실 같구나”라며 순채의 맛을 예찬했다. 고려말 유학자 목은 이색은 지인으로부터 순채 항아리를 선물받고 기쁜 마음을 한시로 노래했다. 조선 전기의 최고 문신 서거정은 ‘순채가’를 지어 “순나물은 남국의 산물 / 야로가 부지런히 뜯어서 / 갖다 내게 주니 / 빛과 맛이 모두 특이하네 / 미끄럽고 미끄럽고 자디잘고 / 실보다 가볍고 우락보다 더 윤기있네 (생략) / 혹은 날로 먹고 혹은 국을 끓여서 / 간을 잘 맞추니 초계가 향기롭네 (생략)”라고 노래했다. 특히 서거정은 순채를 여덟가지 여염집 부엌야채의 하나로 거론했다.
이같이 선비들로부터 사랑받는 순채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즐겨 먹던 음식이었다. 일반 서민들도 순채를 된장국에 넣어 끓여 먹거나 나물로 무침을 해 먹거나 쌈을 싸 먹기도 했다. <규합총서>에는 순채의 어린잎을 오미잣국에 넣고 잣을 띄운 ‘순정과(蓴正果)’가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순채화채’라고 한다.
- 유일한 순채 서식지 천진호 복원은
동해안 석호에 서식하는 순채는 옛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530년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 간성군 편에는 선유담 못에 순채가 가득하다고 했다. 선유담의 순채는 이후에도 문인들의 글에서 수차례 언급되는데, 호수에 가득한 순채 풍경이 장관이라고 했다. 고려말 문신 안축이 영랑호를 노래한 한시, ‘영랑포에서 배를 띄우다(永郞浦泛舟)’에도 “연잎은 씻은 듯이 깨끗하고 / 순채는 매끄럽고 부드럽네”라는 대목이 나온다. 순채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강릉도호부와 고성군의 토산으로 나오며, 양양의 읍지인 <현산지>에도 순채가 양양의 물산으로 나온다.
동해안 고을의 지명에도 순채의 흔적이 남아있다. 고성군 죽왕면 삼포리는 순포와 황포, 포월 3개 마을이 모여 삼포리가 되었는데, 삼포1리는 ‘순포(蓴浦)마을’이라는 옛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5백년 전 마을 인근 연못에 순채가 많이 자랐다고 한다. 강릉시는 최근 순채가 많아 산다고 해서 순포라는 이름이 붙은 ‘순포호’ 습지를 복원해 순채 복원을 시도하고 있다.
맑고 깨끗한 호수에서만 자생하는 식물로 세속의 탐욕을 버리고 소탈한 생활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담은 순채. 지금은 고성군에만 남아있는 소중한 자생식물이다. 옛 문헌에 순채로 뒤덮여 장관을 이뤘다고 하는 고성군의 선유담이나 지금 거의 유일한 순채 서식지로 알려진 천진호의 보존과 복원 소식은 시원하게 진행되는 게 없다.
옛 선비들이 꿈꾸는 안빈낙도의 삶. 그 소박한 희망을 담은 한 그릇의 순채국을 언제쯤이나 맛볼 수 있을까?
엄경선 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고성 천진호의 순채. <사진 제공 속초고성양양환경운동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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