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호 씨는 결혼 후 얼마 지나니 않아 새로운 업무를 맡게 됐다. 장진군과 풍산군 일대에서 사냥을 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박 씨의 얘기에 따르면 평양 미림비행장 안에 김일성 일가의 사냥터가 있는데 그곳에 가져갈 짐승을 잡는 것이 그의 업무였다 한다. 이때 그는 점점 북한의 현실에 회의감을 느끼게 됐다. 자신과 함께 일하는 선배 장교와 북한 사회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남쪽 라디오 방송도 듣게 된다.
3년 정도 사냥 업무를 담당하다가 다시 함경남도의 한 비행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는 그곳에서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알려면 라디오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한 조종사에게서 라디오 하나를 구했다. 그는 처음에 남쪽 방송을 들으면서도 방송 내용이 전부 사실은 아닐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방송 내용에 신빙성이 있다고 느꼈다. 그때가 1990년대 초로 한국이 제도적 민주화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을 때이다.
1994년 그가 대학반에 다닐 때 김일성이 사망했다. 이후 그는 중대장을 맡았는데 남쪽 라디오 방송 청취는 멈추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며 중국에 진출하는 한국 기업이 늘어났고 남쪽의 기술로 만들어진 제품들이 북한에도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물건만 들어간 것이 아니라 남쪽 소식도 북한 민간에 전해졌다. 박 씨는 이때의 풍문과 자신이 라디오에서 들은 이야기들을 대조하며 남쪽에 관한 사실을 검증했다.
라디오 방송 들으며 한국 정보 파악
1990년대 중·후반 북한은 국제적 고립과 자연재해 등으로 경제가 극도로 어려워졌다. 이는 이른바 ‘고난의 행군’ 기간으로 북한은 처참하게 변했고 이를 거치며 박 씨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한 직장에서 반 이상의 사람들이 죽은 경우도 있었고 역전에 죽은 사람이 널렸는데 이를 수습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행정력이 붕괴됐다. 농촌에서도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아 농업생산량은 현저히 낮아졌다.
군대 안의 상황도 심각했다. 중대원 100명 중 30~40명이 영양실조 상태였다. 영양실조가 아닌 이들 중에서는 노역 차출로 나가는 대원들이 있어 이들을 빼고 나면 몇 명 남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중대장들이 모여 회의를 할 때면 자신들이 중대장이 아니라 분대장이라 자조하기도 했다 한다.
그즈음 그는 탈북을 결심한다. 탈북을 결심한 이후에는 남쪽 라디오 방송을 들으면서 한국에서는 쌀이 얼마인지, 저소득층의 임금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추론해 나갔다. 자신이 한국에 가면 저소득 계층이 될 거라는 생각에서 그런 정보를 파악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탈북 결심을 당장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아니 그런 시도를 할 수가 없었다. 탈북을 하기 위한 수단이 당시로서는 뚜렷하게 없었다. 공군 조종사처럼 비행기를 몰고 내려올 상황도 아니었고 중국으로 탈출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컸다. 중국에서 잡혀서 북송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장기적인 계획을 세웠다. 바다로 탈북하기로 하고 하나씩 준비해나갔다.
탈북 계획 일환으로 해상부업
한편 부대에서는 배급이 원활하지 않아 박 씨는 부대를 유지할 방법을 스스로 마련해야만 했다. 그는 중대 차원에서 해상부업, 즉 해산물을 채취해서 그것을 판매하거나 부식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다른 간부들에게 제시했다. 원래는 연대 이상의 단위만 해상부업이 가능했지만 그는 간부들을 설득했고 자신의 부대는 중대임에도 해상부업 허가증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해상부업은 탈북 계획의 일환이기도 했다.
중대에서 제재기 등 각종 기계 설비를 마련했고 그 기계들을 활용해 노 젖는 배를 하나 만들었다. 해상부업은 이 조그만 배로 조촐하게 시작했다. 하지만 중대의 부업은 성공을 거두었다. 문어, 성게, 해삼은 바다에서 건진 족족 중간 상인들에게 팔려나갔고 덕분에 중대원들도 잘 먹을 수 있게 됐다. 얼마나 성공적이었던지 사단장이 그를 데리고 다니며 각종 강연을 하게 했고 훈장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했다.
자신의 중대가 자력으로 잘 건사해 나가자 연대의 간부들이 그에게 부탁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간부라도 비전투요원이면 배급량이 적었는데 이 사람들은 박 씨에게 여러 가지를 요구했다.
하루는 정치지도원이 그에게 이불장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의 중대에는 제재기가 있기에 가구를 만들어 달란 부탁이 들어왔던 것이다. 그는 정치지도원에게 이불장을 만들어 줬는데 그 이불장이 정치지도원의 내연녀에게 전달됐다. 이 사실을 안 박 씨는 연대장에게 보고했고 정치지도원이 처벌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이후에도 정치지도원은 무사했다. 박 씨는 정치지도원이 연대장의 약점을 잡고 있어서 이 두 사람이 서로의 비위를 덮은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후 정치지도원의 반격이 시작된다. 박 씨가 군기가 해이한 하사관을 혼낸 적이 있는데 정치지도원은 이를 문제 삼았다. 부하들에게 함부로 행동하는 하사관이 일과 중에도 일을 하지 않고 술에 취해 자고 있었는데 박 씨는 너무 화가 나서 그 하사관에게 물을 뿌리고 때린 일이 있었다. 정치지도원은 이를 ‘군벌관료주의’라 비판하며 상부에 보고했고 여기에 대한 조사가 이뤄졌다. 그런데 상부에서 조사를 해보니 박 씨가 일 잘하는 사람이라고 보증을 서주는 지휘관들이 많았다. 하지만 상급부대의 정치지도원이 예하부대의 군인을 처벌하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박 씨는 결국 대위에서 상위로 강등되어 풍산의 한 부대로 쫓겨나게 된다.
<다음에 계속>
구술 박명호·정리 이광호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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