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과가 바뀌어 공병이 된 박명호 씨가 레이더 공사를 위해 강원도 산골에 파견 나가 있을 때의 일이다. 그때가 1980년대 후반이었는데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남쪽에서 전단과 함께 담배, 속옷, 사탕, 비누 등이 부대 인근 산간에 많이 날아들었다. 부대원들은 명령에 따라 그것을 줍기 위해 돌아다니기도 했고 주워 온 물품들은 부대 막사 구석에 쌓아 두었다.
그런데 부대원 누구도 쌓여 있는 그 물건들을 섣불리 쓰려 하지 않았다. 그 물건들은 한쪽 구석에서 그저 차곡차곡 쌓여 가고 있었다. 남쪽에서 넘어온 담배를 피우면 손이 썩어 들어간다는 교육도 받곤 했기에 상당수 군인들이 그 말을 진실인 양 받아들이기도 하는 터였다.
인근 육군 부대에서는 쌓아놓은 전단 등을 상급 부대에서 자주 수거해갔지만 자신이 속한 부대는 그렇지 않았다. 공군 산하의 공병이라 파견을 나와 있었기에 본대의 수거 차량이 인근 육군 부대와는 달리 아주 드문드문 파견 부대를 방문했다. 그게 한 달에 한 번 정도였다. 그래서 상당한 양이 모인 상태였다.
당시 부대에서는 담배 공급이 끊긴 상황이라 부대원들의 담배에 대한 간절함이 점점 커져 갔다. 그러던 와중에 부대원 한 명이 부대 구석을 지키던 남쪽 담배에 손을 댔다. 박 씨는 그 광경을 보면서 ‘저 친구가 제 정신이 아니구나’ 싶었다. 담배의 포장을 뜯어 불을 붙이는 모습도 유심히 지켜봤다. 남쪽에서 온 담배를 피우다 죽는 건 아닌가 걱정스런 생각도 들었다. “심심한데 필 만하군.” 담배를 피운 부대원이 여유롭게 한 마디 내뱉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손이 썩지도 않았고 그가 갑자기 쓰러져 죽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막사 한쪽에 모아둔 남쪽 담배는 그날 밤에 다 사라졌다.
북한에서는 군인들에게 ‘주인집’이 하나씩 있다고 한다. 고향을 멀리 떠나온 군인들이 친하게 지내는 민간인의 집을 그렇게 부른다. 휴가를 거의 갈 수 없는 북한 군인에게 ‘주인집’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주인집’에 딸이 있으면 제대 후 결혼을 하는 경우가 제법 된다고 한다.
박 씨에게도 ‘주인집’이 있었다. 그의 친한 친구가 운전병이었는데 초년병 시절 그 친구가 장진의 한 민간인을 위해 나무를 옮겨준 일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운전병 친구가 그 집에 한번 놀러가 보자고 해서 가게 됐는데 가보니 그 집에 고등중학생 딸이 있었다. 박 씨는 수년 동안 틈만 나면 꾸준히 그 집에 놀러 갔다.
일반적으로 북한에서도 대학을 졸업해야 장교(군관)가 되는데 ‘직발’이란 제도도 있어 상부의 추천에 의해 군관 진급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 사람들은 진급 이후 대학 교육에 준하는 교육을 받게 된다. 박 씨는 이 ‘직발’ 제도로 군관이 됐다.
군관이 된 그는 장진에서 첫 근무를 하게 된다. 보통 공병은 각종 건설을 위해 떠돌이 신세를 면하기 힘든데 그는 운이 좋게도 정주 생활이 가능한 장진의 비행장으로 발령이 났다. 행운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그가 맡게 된 업무도 활주로의 특수 장비만 유지, 관리하면 되는 것이어서 상당히 편한 편이었다.
타지에 멀리 떠나 있다가 장진으로 돌아오자 운전병이었던 친구가 ‘주인집’ 딸과의 결혼을 권했다. 운전병이었던 친구는 이미 그 집의 또 다른 딸과 결혼한 터였다. 그런데 ‘주인집’ 바깥어른은 박 씨를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키가 훤칠하고 인물도 좋은 예비 장인은 박 씨의 외모에 낮은 점수를 줬다. 그러나 예비 장모가 남자는 좀 못나야 한다며 결혼에 찬성했다. 잘생긴 남편을 둔 예비 장모는 젊어서 마음고생이 심했다 한다. 더군다나 ‘주인집’이라고 꾸준히 자신의 집에 찾아오던 청년이 군관이 되어 다시 와서 딸을 달라 하니 예비 장모는 반길 수밖에 없었다. 박 씨는 그렇게 결혼에 골인했다. <다음에 계속>
구술 박명호·정리 이광호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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