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근 작가에게는 특이한 버릇이 있다. ‘테라크랩팜’의 운영시간이 지나거나 작업이 끝난 후에도 그는 작업실에서 한동안 앉아 있다가 자리를 뜬다. 만약 일을 마치고 바로 작업실을 나간 날은 수돗물을 틀어 놓고 가는 것처럼 이상한 느낌이 든다고 한다. 작가는 일을 마치고 누구의 방해도 허락하지 않는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다. 심지어 손님이 와서 함께 나가야 할 때에도 그는 손님을 먼저 나가게 한 후 잠시라도 혼자서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작가가 퇴근 전 갖는 이 시간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좋은 생각은 스케치 작업으로 연결되고 더 나아가 작품으로 탄생한다.
또한 작가는 기록을 자주 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생각이 날 때마다 기록을 한다. 바쁘게 무언가를 하다가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하던 일을 멈추고 메모를 한다. 특별히 정해진 노트가 있어 거기에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달력이나 전단 같은 종이들을 모아 기록한다. 껌 포장지에 기록할 때도 있고 친구들과 얘기하다가 냅킨에 쓸 때도 있다. 기록은 꼭 정해진 형식을 갖지는 않는다. 작가는 자신의 기록을 누가 보면 낙서 같기도 할 거라고 얘기했다. 작가는 일부러 질 좋은 종이를 준비해서 아이디어를 내야지 하고 책상 앞에 앉으면 괜찮은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생각이 나는 대로, 그리고 아무 종이에다가 기록을 한다는 것이다. 기록은 연필로 한다. 어딘가 갈 때도 가방에 항상 연필을 가지고 나간다. 기록을 많이 하기에 조그만 연필깎이를 지참하는 것도 필수다. 박 작가의 연필 사랑도 흥미롭다. 작가는 흑연이 종이를 누르며 지나가는 느낌이 좋다고 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에는 학생들에게 연필 사용을 적극 권했다.
아이디어 숙성시키는 ‘잠재우기’
작가의 작품 세계에서는 가시가 중심이 된다. 생선가시, 식물의 가시, 못 등, 뾰족한 것이 표현의 대상이 된다. 작가는 나뭇가지도 가시의 변형으로 본다. 해안의 테트라포드도 그에겐 가시로 보인다. 작가에게 물었다. 왜 가시가 작품 활동의 중심이냐고.
“저는 사람들이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것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고 봅니다. 흉하게 보이는 것도 얼마든지 다르게 보고 새로운 것으로 재창조할 수 있지요. 가시도 아름다울 수 있고 못도 꽃이 될 수 있어요. 고정된 시각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하나의 대상을 재해석해서 아름답게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가시를 보는 고정된 관점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싶습니다.”
작가는 작품 활동에 있어서 ‘잠재우기’를 중시한다. 작가가 말하는 ‘잠재우기’는 ‘숙성’의 다른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지금까지 작품을 만들어오며 자신의 작품에 불만일 때가 많았다. 아무리 열과 성의 다해 만들어도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작품이 나오지 않으면 본인에게 실망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아이디어를 바로 작업으로 옮기기보다 아이디어를 숙성시키는 과정, ‘잠재우기’가 필요하다고 느끼게 됐다. 번뜩이는 아이디어, 해박한 지식보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이뤄진 오랜 고민이 더욱 좋은 작품을 탄생시킨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겪고, 겪고, 또 겪다보면 실패와 시행착오를 거쳐 비로소 예술이 완숙해질 수 있겠지요.”
작가는 기법이나 기술은 그렇게 중요하다고 보진 않는다. 그리고 작품을 만들 때 너무 많은 치장은 지양한다. 작가가 목판에 꽃을 새긴 작품은 이러한 생각이 반영된 결과물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그라인더로 5분 만에 만들어냈다. 이 작품을 만들고 나서는 이렇게 간단한 걸 지금껏 하지 못하고 어렵게 다른 작품들을 해온 거 같아 한숨을 쉬었다 한다. “5분이면 끝날 것을 50년이 걸렸네”라고 스스로에게 한탄 섞인 말을 내뱉었다. 평생 자신이 엉뚱한 곳에서 호들갑을 떨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한다. 작가가 말한 이 작품을 보면 투박하고 거칠고 단순하다. 그러나 단조롭지 않은 야생화 같다. 거친 풍파를 이겨내고 야생화가 피듯이 작가는 오랜 ‘잠재우기’의 과정을 통해 비로소 이 작품을 만들었다. 야생화는 어디에 어떻게 피었는지 사람들이 몰라주더라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밝은 태양 아래 발산한다. 작가의 이 꽃들은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작가의 마음속에서 핀 꽃 같았다.
공공미술 관심 많아…“예술 일상화 필요”
박영근 작가는 개인의 작품 활동에도 열정을 불태우지만 공공미술에도 관심이 많다. 이는 박영근 작가의 평소 소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작가는 우리 사회에 예술의 일상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보통 미술 전시에는 사람들이 많이 가지 않는다. 전시회에 가는 사람은 한정돼 있다. 예술가는 있지만 예술을 향유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이다. 박 작가가 보기엔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공공장소에서 문화 접근성을 개선해야 한다. 이 말은 예술 전시와 예술 행위가 공공장소에서 더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특정한 장르만이 아니라 더욱 많은 분야의 예술을 사람들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예술 정책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예술가 스스로도 자신의 예술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밖으로 들고 나가야 한다. 작가가 게 생태체험관을 운영하는 것은 이러한 생각과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가 생태체험관이라는 대중적인 장소를 운영하고 그곳에 작업실을 연결시켜 놓은 것은 어쩌면 사람들이 예술에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창구가 되게 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속초의 공공미술 작품 건립에 활발하게 참여했다. 속초해수욕장의 명물 포토존 ‘하트나무’, 아바이마을의 조형물 ‘아바이상’, 설악로데오거리 ‘어부상’과 ‘연인상’ 등은 작가의 평소 신념이 반영된 결과물이다.
이광호 객원기자 campin@hanmail.net
박영근 조각가
작가의 작업에서는 ‘가시’가 주된 표현 대상이다.
작가가 5분 만에 완성한 작품. 작가는 이 작품을 만든 후 “5분이면 끝날 것을 50년이 걸렸네”라고 스스로에게 한탄 섞인 말을 내뱉었다.
속초해수욕장에 있는 <하트나무>.
청호동 아바이마을 조형물 아바이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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