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과 속초 사이에 바다 전망으로 유명해 주말이면 사람들이 북적대는 커피숍. 그 맞은편 별관 건물 3층에 최재도 작가의 작업실이 있다. 그 건물의 1층 입구에는 ‘이야기 제작소(Story Factory)’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3층에 오르자 밝고 아담한 공간이 나온다. 작업실에는 두 개의 면에 창문이 크게 배치돼 있어 방 안에 밝은 기운을 더한다. 한쪽 면의 창문은 설악산 울산바위를 향해 나 있고 다른 면의 창문은 동해를 향해 있다. 아무 생각이 없다가도 이 방에 들어서면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에 취해 문학적 감수성이 샘솟을 것 같다.
고성 토성 최재도 작가 ‘이야기 제작소’
작업실 내부는 단출하다. 책상에 컴퓨터 한 대, 손님을 맞는 소파, 그리고 책장 외에는 별다른 소품들이 없다. 책장도 크지 않고 작가가 작업에 필요한 책만 집에서 가져와 꽂아둔 상태다. 그리고 작업실에는 요즘은 사람들이 잘 쓰지 않는 두툼한 책처럼 큰 라디오도 놓여 있다. 작가는 라디오 극을 주로 작업해 왔기에 평소에 라디오를 자주 청취하며 정보를 얻는다. 자신의 작품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작품도 찾아 들으며 라디오 드라마의 흐름의 살피고 있다.
극작가의 작업실이라고 하면 수많은 대본들이 쌓여 있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곳은 마치 쉬기 위해 마련한 방처럼 아늑하고 깔끔하다. 작가는 실제로 작업실에 나와 작업을 하다가도 자주 여유로운 시간을 갖는다. 커피숍에서 차를 한 잔 마시고 그 옆에 크게 펼쳐진 솔숲을 거닐며 동해와 설악산을 바라본다. 작업마저도 때론 여유롭게 이뤄진다. 작업실 창가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며 노트북에 글을 쓴다. 작가처럼 그 자리에 서 본다. 생각이 잘 나지 않을 때 잠시 고개만 들어도 새로운 생각이 창밖에서 스며들어올 듯하다.
이 작업실은 작가의 대외 활동 장소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곳에서 손님을 맞이하며 사람들과 교류한다. 그리고 명상을 좋아하며 외부 활동을 많이 하지 않는 작가에게는 이 작업실이 요즘의 세태를 살피는 근거지이다. 자신의 작업실 건너편에 있는 커피숍에는 주말에 전국 여러 지역 사람들이 몰려드는데 커피숍 아무 자리에 커피 한 잔만 놓고 앉아 귀만 열고 있어도 요즘 사람들의 생각이 어떤지 가늠할 수 있다. 사람들의 차림새나 행동도 관찰 대상이다. 작가의 작업실에는 두 가지 커다란 창문이 있는 셈이다. 하나는 자연의 풍경을 바라보는 창문, 하나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관찰하고 소통하는 창문이다.
작업실의 건너편에 있는 건물과 그 주위 바다에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와는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은 조용한 외딴방의 느낌이다. 작업실을 나와서 몇 발짝만 걸어도 사람들에게 치이는 기분이 들지만 그의 작업실로 다시 들어가면 고요한 분위기이다. 작가는 일부러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다. 외판원도 이곳을 찾지 않을 정도로 세상에서 온전히 홀로 고립될 수 있는 공간이다.
라디오 단막극 80여편·연속극 50여편…
최재도 작가는 1977년 ‘KBS 라디오 드라마 현상공모’에 당선된 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스물한 살 때였다. 이른바 ‘소년급제’이다. 글로써 자신의 인생에 승부를 걸어보기 위해 해군사관학교를 중퇴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의 일이다. 당시 심사위원으로 극작가 신봉승과 차범석이 있었는데 차범석은 이때의 수상작인 <천사의 저주>를 몇 년 동안 보아온 작품 중에서 최고라고 극찬을 했다 한다. <천사의 저주>는 그의 데뷔작이었음에도 이듬해 EBU(유럽방송연맹)가 주최하는 <라디오 우수드라마 콘테스트>에 출품됐다. 방송사 내부에서도 그의 작품이 국제적으로 경쟁할 만하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그가 군대를 갔다 온 80년대 초반에는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KBS에 가보니 전두환 정권의 방송통폐합으로 자신이 잘 모르는 직원들이 와 있어 KBS에서 작업을 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극작을 멈추지 않았고 1983년, ‘계몽사 아동 문학상 동극 부문’에, 198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 각각 당선됐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모리시계상, 온다스상 같은 국제 라디오 드라마 콘테스트에 여러 차례 출품된 바 있고 1991년엔 이탈리아 RAI방송과 슬로바키아 국영방송에서 그의 작품을 수입해 가기도 했다.
그는 지금까지 극작품 20여 편, 라디오 단막극 80여 편, 라디오 연속극 50여 편, TV 다큐 10여 편, 라디오 다큐 30여 편을 집필했고 신문 칼럼도 원고지 4만 매 이상 썼다. 그런데 어디 가서 자신을 작가라고 하면 “진짜 직업이 뭐냐?”고 다시 묻는 사람들이 제법 된다고 한다. 보통 글을 쓰는 작가라고 하면 한편으로는 멋지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론 ‘우리 사회에서 글쟁이는 생계가 쉽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는 속초시청 문화계장과 속초문화원 사무국장으로 몇 년 일한 바 있지만 지금까지 주된 생업은 방송극작가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방송구성작가가 아닌) 방송극작가는 시나리오 작가나 소설가보다 대체로 경제적으로는 더 나은 상황이다. 물론 이 얘기는 젊은 작가가 아니라 베테랑 방송극작가를 대상으로 했을 경우일 것이다. 다수의 소설집을 낸 작가가 기초생활수급 대상자인 경우도 있고 시나리오 작가가 수십 편의 작품을 썼어도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는 사례도 있다. 반면 꾸준하게 활동한 방송극작가는 이들에 비해 수입이 훨씬 나은 편이다.
유럽에서는 라디오 드라마가 예술의 한 장르로서 인정받는 분위기가 있다고 한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사무엘 베케트도 다수의 라디오 극을 썼다. 유명한 작가들도 라디오 드라마를 먼저 써서 방송을 통해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고 이를 반영하여 다시 완성된 작품을 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라디오 드라마가 일종의 도구처럼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이 방송극이 가진 장점이라고 볼 수도 있다. 방송극은 대중들의 반응이 활발해 사람들의 견해를 더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리고 대중들의 관점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분야에서 극을 재해석하는 사람들, 즉, 연출가, 배우, 음향담당자 등의 전문적인 견해도 살필 수 있다. 방송극의 1차 독자는 연출가와 배우, 제작진인데 이들이 이따금씩 극의 흐름과 대사 등에 대해 의견을 준다. 작가는 이를 작품에 반영함으로써 좀 더 좋은 작품으로 재탄생시킬 수 있다. 그런데 최재도 작가는 젊은 시절에 연출가 등의 견해를 간섭으로 느껴 불쾌하게 생각한 적도 있다 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이들의 의견이 있어 자신의 작품을 다듬을 수 있기에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다음에 계속>
이광호 객원기자 campin@hanmail.net
·최재도
-1957년 속초 출생
-속초고등학교 졸업, 해군사관학교 중퇴
-강원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1977년 ‘KBS 라디오 드라마 현상
공모’ 당선
-1983년 ‘계몽사 아동 문학상 동극
부문’ 당선
-198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희곡
부문’ 당선
-희곡집 ‘멈춘 곡선의 우아한 고독’
-희곡집 ‘꿀벌의 바벨탑, 그 시도에
대한 고백’
-장편소설 ‘저무는 왕국의 별 밝은
언덕’
최재도 작가가 지난 4일 ‘최재도 이야기 제작소’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최재도 작가의 이야기 제작소 내부.
최재도 작가의 작품들은 KBS를 대표하는 라디오 방송극으로 여러 해외 콘테스트에 출품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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