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학자이며 자아(自我)심리학자인 에릭슨(Erik Homberger Erikson)은 인간의 심리발달을 설명함에 있어 성인기와 노인기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였다. 에릭슨은 인간의 전 생애를 통한 발달과 변화를 강조했다. 그의 ‘심리사회적 발달이론 8단계’는 발달 및 성격이론에 독창적인 공헌을 했는데, 여기에는 성인초기, 성인중기, 성숙노인기가 포함되어 있다. 인간의 발달 단계 중 마지막 단계인 성숙노인기는, 자아통합의 시기로써 인간이 자신의 거의 완성적 조력과 성취에 대해 성찰하는 시기라고 봤다. 자아통합(ego integration)은 모든 관점(결혼, 자녀, 손자, 직업, 취미 등)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겸허하게 그러나 확고하게 “나는 만족스럽다”라고 확신하는 능력을 갖게 한다. 그러나 또 다른 극단에는 자아통합의 결여로 인생의 쓴맛과 혐오를 느끼는 노인은 인생을 다시 살 수 없다는 후회와 자신의 부족함과 결함을 외부로 투사(projection)함으로써 그것을 부정하려 한다. 슬픔과 후회가 심하게 되면 우울증, 노인성 정신병, 과대망상증을 초래할 수 있다고 에릭슨은 설명한다.
심리학에 점화효과(priming effect)라는 말이 있는데, 앞서 했던 생각이나 경험이 무의식적으로 다음 생각이나 경험에 영향을 준다는 현상으로, 예를 들어 병원하면 의사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원리이다. 노인, 노화, 나이 듦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의 상당수는 점화효과의 결과이다. 즉, 알츠하이머, 노쇠, 치매, 의존, 질병, 죽음, 무능함 등과 같은 단어를 통한 사전 자극이 노화에 대한 부정적인 관념을 생기게 한다는 것이다.
아직 젊은 60대의 노인이 물건을 선반에 올리다 무거워 떨어뜨렸다. “아휴, 바보같이, 나이가 드니 이 모양이네” 이런 부정적인 말은 ‘노인, 나이 들어 감’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물건을 떨어뜨린 것은 선반이 높아서 일수 도 있고 물건이 무거워서 일수 도 있는 것이지 꼭 나이 들어서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반면에 성취, 조언, 통달, 현자, 지혜 등과 같은 단어는 ‘노화, 나이 듦’에 대한 긍정적인 관념이다. 나이 든다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부정적 의미로 다가오지만 노화는 긍정적으로 평가받아야 할 인생의 한 과정이고 나이 듦은 무조건적인 열등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본말 중에 노인의 청춘을 의미하는 적추(赤秋)라는 말이 있다. 이 시기는 물질욕, 출세욕 등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로움을 얻는 시기라는 것이다. 청춘이 만개할 여름을 맞이할 푸른 봄이라면, 적추는 겨울이 오기 전의 결실의 계절로써 풍요롭고 아름다운 단풍의 붉은 가을이다. 쓸쓸함과 애련함도 노년의 일부임에는 틀림없으나 결실과 풍요가 노년에 더욱 걸맞은 이미지로 다가 올 수도 있다. 늙은 벚나무라 꽃피지 않은 봄날이 있었던가? 모든 봄 나무는 죽기 전까지는 반드시 꽃이 핀다.
최영걸
속초시사회복지협의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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