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11월 2일(12월 19일) 새벽 3시. 대다수 사람들이 한창 잠에 빠져 있을 시간, 대포동경로당에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더니 이내 여러 명이 북적이기 시작했다. 곧 있을 마을 치성제를 지내기 위해서였다. 대포 바닷가의 새벽 공기는 온도계의 수치를 훨씬 뛰어 넘어 매서웠다.
예년에는 매년 음력 10월 초이틀(대개 양력 11월)에 치성제를 올렸다. 올해는 마을에 흉사가 있어 한 달을 늦춘 것이라고 한다. 하필 올 겨울은 예년에 비해 12월이 유독 더 추운 상황이라 이는 대포 마을 사람들이 행사를 준비하고 치르는 데 악조건으로 작용했다.
12월초부터 음식 장만·금줄 제작
마을 치성제 준비는 행사가 있기 열흘 전쯤인 12월 초부터 시작됐다. 제례 계획을 세우고 음식을 장만하는 것부터 금줄을 제작하고 설치하는 것까지 마을 사람들이 함께 참여해 이뤄졌다. 특이한 것은 ‘생기’(운수)를 봐서 제사 당일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을 따로 선발해서 이러한 준비들이 이뤄진다는 점이다. ‘생기’는 치성제에 참여하는 무속인이 마을 주민들의 생년월일을 따져 정하게 된다. 이를 통해 행사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으로 정해지는 경우 음식 준비에 참여할 수 없고 제사를 지내는 곳에도 갈 수가 없다.
치성제에 사용할 금줄에도 특이한 점이 있다. 일반적으로 새끼줄을 만들 때 오른쪽으로 꼰다. 하지만 금줄을 만들 때에는 부정한 기운을 막고 신성함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왼쪽으로 꼬게 된다. 여기까지는 다른 곳에서의 금줄 제작 방식과 같다. 대포 마을 치성제의 금줄에는 소나무의 가지를 아주 크게 잘라 달아 둔다. 솔잎이 아주 무성하게 붙어있는 채로 1미터 내외의 길이로 잘라 금줄에 매어 둔다. 연로한 마을 주민의 얘기에 따르면 마을의 큰 행사이기에 큰 소나무 가지를 달아둔다고 한다. 이렇게 만든 금줄은 성황당 청소를 한 후에 성황당 벽을 따라 띄워 두게 되며 제사를 준비하는 경로당 입구에도 설치한다.
겨울 새벽에 두 시간 동안 제례
경로당에 모인 주민들은 제례 준비를 하고 식사를 한 후 새벽 네 시도 되기 전에 성황당으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사람들은 두 개 조로 나뉘어 각각 할아버지성황당과 할머니성황당으로 향했다.
할아버지성황당 쪽으로는 무속인을 포함해 7명, 할머니성황당 쪽으로는 무속인 포함 10명이었다. 할머니성황당 쪽이 사람이 더 많은 것은 성황당의 위치가 더 높아서 짐 옮기는 수고를 덜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런데 마을 주민 중 누군가는 할머니성황당의 기가 더 세서 사람이 더 많이 간다는 의견도 밝혔다.
네 시가 조금 지나자 제사 준비는 끝났고 이내 치성제가 시작됐다. 제관 3명과 무속인 1명이 제사를 주도했다. 할아버지성황당의 경우 무속인과 제관을 제외한 나머지 3명이 성황당 밖에서 제사를 지켜보며 제례의 진행을 보조했다. 제사가 시작되자 무속인이 꽹과리를 울리며 사설(辭說)을 이어나갔고 이어 제관이 축문을 읽었다. 축문은 어로 작업의 무사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고 장사가 잘 되게 해달라고 비는 내용이라고 한다.
제관들이 축문을 읽고 제주(祭酒)를 올리는 일, 음식에 젓가락을 옮겨가며 대는 일 등은 여느 제사와 다를 바 없었지만 무속인의 존재는 독특해 보였다. 제례가 시작된 지 20분쯤 지나자 무녀가 문을 열고 나와 소금과 고춧가루를 손으로 뿌렸다. 이는 악한 기운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는 식칼을 땅바닥을 향해 던졌다. 칼은 한겨울의 메마른 땅에 박혔다.
그 이후 15분 쯤 더 지나서 소지(燒紙)가 시작됐다. 소지는 부정함을 없애고 소원을 빌기 위해 흰 종이를 태워 공중으로 올리는 일로 보통 제사에서는 의식이 끝난 후 지방(紙榜)을 한 장 혹은 두, 세 장 정도 소지한다. 그런데 대포 치성제에서는 올해의 경우 400여 장을 소지했다. 할아버지성황당에서 200여 장, 할머니성황당에서 역시 그 정도였다. 무녀는 마을 구성원 각 호별로 세대주의 이름을 한 명씩 부르며 한 장씩 소지해 나갔다.
소지에서 제관 세 명의 임무는 분명하게 구분된다. 한 명이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은 A4용지만한 얇은 한지를 3등분해 접어서 무녀에게 건넸고 다른 한 사람은 마을 세대주 명단을 보면서 축원할 대상자의 성명을 무녀에게 알려 줬다. 나머지 한 사람은 바가지를 들고 소지 후에 떨어지는 재를 받았다.
얇은 한지를 써서인지 촛불로 불을 붙인 종이는 다 타들어 갈 때쯤 무녀의 손에서 공중으로 조금은 빠르게 솟구쳤다. 공중에서 다 탄 후 떨어지는 종이의 재는 거의 흩어지지 않고 형태를 유지하며 아주 천천히 하강했다.
소지는 한참 동안 계속 됐지만 엄숙하거나 지루하진 않았다. 무속인의 축원은 가락과 리듬을 타고 잠시 빨라졌다 느려지기도 했고 잠깐 멈추다가 말을 하듯이 하는 등 변화무쌍하게 이어졌다. 비슷한 내용도 단어와 어미를 바꾸어 가며 흥을 실었다. 그리고 농담도 한 마디씩 하며 분위기를 풀어줬다. “OOO(세대주 이름)가 옳습니다. …소원대로 이뤄 주시고…, …뜻대로 이뤄 달라 하고…, 대포동에 사고 없이 해주세요. …10월에 하면 춥지가 아니 할 걸, 왜 11월에 해서 이렇게 추울까. …아유, 손 시려 죽겠네.” 성황당 내부는 난방이 되지 않아 너무 추워 약간의 불평도 농담처럼 하며 제사 참여자들의 웃음을 끌어냈다. 그러나 날씨를 불평하다가도 이내 “날이 이만해도 괜찮아”라며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했다.
마치 판소리 공연 같던 소지 과정은 그렇게 한 시간이 넘어서야 끝났다. 소지가 끝난 후 마지막 술과 절을 올리고 제사가 마무리됐다. 땅에 꽂힌 칼도 뽑고 금줄도 걷어냈다. 제사상을 차리는 것부터 정리하기까지 제사의 전 과정은 두 시간 넘게 걸려 6시가 넘었지만 한겨울의 해가 뜨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제례가 끝나고 마을 사람들이 다시 경로당에 모였다. 제례에 참석하지 못한 이들도 경로당에 함께 모였고 서로 노고에 감사를 표하고 이야기꽃을 피우며 아침 식사를 함께 했다. 행사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치성제는 마을 잔치의 성격도 띠므로 점심에는 마을 부녀회가 수협, 해경, 동사무소 등 마을 인근 기관의 임직원들을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며 마무리됐다.
이광호 객원기자 campin@hanmail.net
12면에 관련기사▶
대포마을 주민들이 할아버지성황당에서 제례를 지내고 있다.
무녀가 마을 세대주의 이름을 한 명씩 부르며 소지하고 있다.
대포동 경로당에 금줄을 내걸었다.
치성제를 마친 마을 사람들이 경로당에 모여 아침 식사를 하고 있다.
-------------------------------------------------------------------------------------------------------------------------------------------------------------
■오랜 역사 지닌 대포 마을치성제
“할아버지성황당 제례 1,000년 역사”…구전으로 전해져
2011년까지 3년에 한 번씩 12마당 3일 굿판 지내
할머니성황당, 일제강점기 일본신사 있던 자리
대포 마을치성제는 오랜 역사를 갖는다고 한다. 할아버지성황당과 할머니성황당 두 곳에서 동시에 제례가 이뤄지는데 할아버지성황당에서의 제례는 1,000년이 넘었고 할머니성황당의 경우 100년 정도 됐다고 한다. 물론 할아버지성황당에서 지내는 치성제의 기나긴 역사에 대한 구체적인 입증 자료는 없고 윗대의 어른들로부터 구전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마을의 역사와 제례의 성격을 고려하면 최소 몇 백 년 전부터 이 마을에서 치성제가 있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가을걷이를 감사히 여기는 제례나 축제가 농경 마을에 있듯이 바닷가 마을에 어민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제례가 있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대포 성황당에는 우리의 아픈 역사도 서려 있다. 할머니성황당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 신사가 있던 자리다.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를 강점하던 때에 대포항은 그 일대에서 가장 큰 항구였고 양양의 광산에서 캐낸 철광석을 반출하는 곳이었다. 대포리의 요지는 일본인들이 차지해 생업을 영위했는데 할머니성황당 자리는 그런 일본인들이 복을 비는 신사였던 것이다. 마을의 혹자는 일제 강점기 전에 그 터에 성황당이 있었고 거기서 해마다 치성제를 올렸다고 얘기하기도 하는데 만약 그렇다면 일제가 우리의 공동체적 전통을 없애고 신사를 만든 게 된다. 하지만 할머니성황당이 일제 강점기 이전에도 있었다는 주장 또한 구전일 뿐 기록은 없는 상황이다.
지난 수십 년 사이에 치성제의 규모에는 변화가 있었다. 원래 매년은 아니지만 3년에 한 번씩 무속인 일곱, 여덟 명이 참여하는 큰 굿판이 열렸다. 굿은 하루에 네 마당씩, 2박 3일 동안 열두 마당이나 계속되는 대포 마을의 대형 행사였다. 그러던 것이 2011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은 열두 마당의 3일 굿판이 열리지 않고 있다. 그 굿판은 단순히 굿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음식을 준비하고 나눠 먹는 마을 잔치로서의 성격도 가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3,000만 원이 넘는 비용도 부담스러운 데다가 젊은이를 비롯한 사람들의 참여가 많지 않아 3일의 굿판은 6년째 열리지 못하고 있다.
예전만 해도 마을 치성제는 해안가 동네면 거의 어디나 있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성황당이 마을마다 있었고 해양 사고도 많아 해양 안전을 비는 마을 치성제가 없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목선에 돛단배로 어로 작업을 하던 시절엔 일기 예보도 없었기에 개인의 경험에 의해 기상을 예측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사고 위험성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이런 상황에서 해안가 마을의 치성제는 어로 작업의 안전을 기원하는 행위이자 해양 사고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계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대한민국이 산업화되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인근의 성황당들이 많이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대포에서는 건물을 개축하기는 했어도 성황당이 여전히 남아 있다. 마을 주민들은 성황당을 유지하며 오랜 전통을 지켜 온 것에 큰 자부심을 드러냈다. 대포에서는 치성제를 지역 문화제로 등록하려고 노력한 적 있지만 속초시청에서 문화제 등록 요건에 맞지 않는다고 밝혀 등록하지 못했다. 이번 제례를 통해 만난 대다수 대포 주민들은 마을 공동체의 치성제가 지역의 문화적 가치를 지닌 것이기에 보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기를 한결같이 바라고 있었다.
이광호 객원기자 campin@hanmail.net
대포마을의 할아버지성황당. 제례를 지낸지 1,000년이 넘었다는 구전이 전해오고 있다. 마을치성제를 위해 금줄을 둘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