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때이긴 한가 보다. 요즘 들어서는 어느 음식점에 가더라도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12월. 이런 저런 모임들이 송년회라는 이름으로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사실 인구가 10만 명도 안 되는 속초 같은 작은 도시가 모임만큼은 어느 대도시 못지않게 많은 것 같다는 느낌을 갖는다. 불경기라는 말도 요즘에는 해당사항이 없는 듯 느껴진다. 필자의 경우도 매년 초·중·고 동창회를 필두로 각종 사회단체, 종교단체, 친목단체 등의 송년회를 하다보면 12월 한 달이 훌쩍 다 가곤 했다. 어쨌든 어느 송년회든지 간에 지난 일 년에 대한 회고록이고 또 새롭게 시작될 새해에 대한 다짐이기도 하니 나름 의미는 있었을 것이다.
얼마 전 아내의 권유로 우연찮게 보게 되었지만 꽤 집중해서 보게 된 ‘고백부부’라는 TV드라마가 있었다.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타임슬립’해서 그들이 가장 찬란하게 빛나던 20대 초반 청춘의 시절로 돌아가서 벌어지는 여러 에피소드들이 주된 내용이었다. 꽤나 재미와 의미를 느끼게 해준 드라마였다. 그런데 문득 그 드라마 속 주인공들처럼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어느 시절로 돌아가고 싶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장 찬란하게 빛나던 시절은 언제였을까? 아니 다시 일 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올 한해 내가 보낸 시간들보다 더 잘 지낼 자신은 있는 것일까?
예전에 박노해 시인의 ‘다른 길’이라는 책을 읽고 난 후의 느낌들이 떠올랐다. 민주화 유공자로 선정되었으나 ‘과거를 팔아 현재를 연명하지 않겠다’며 홀연히 그 만의 유랑 길에 나섰다는 박노해 시인. 그의 책은 사진 에세이집이어서 읽기도 편했다. 책에 실린 인디아에서 티베트에 이르는 기행 중에 찍은 사진들은 피사체에 대한 이해와 동감을 담고 있어서인지 그 깊이와 아름다움이 아주 돋보였다. 또 각각의 사진들에 곁들인 그의 단상(短想)들은 내 맘속 깊은 곳에 울림을 주었었다. 처세술로 가득한 요즘 책들, 모두가 현자라도 되는 양 좋은 말, 좋은 글귀로 가득한 인터넷과 SNS에 떠도는 글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감동이 밀려왔었다.
방향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며 보낸 지난 일 년의 시간을 마무리하는 요즘, ‘우리 인생에는 각자가 진짜로 원하는 무언가가 있다. 나에게는 분명 나만의 다른 길이 있다. 그것을 잠시 잊어버렸을지언정 아주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지금 이대로 괜찮지 않을 때, 지금 이 길이 아니라는 게 분명해질 때, 바로 그 때, 다른 길이 나를 찾아온다. 길을 찾아 나선 자에게만 그 길은 나를 향해 마주 걸어 온다’는 박노해 시인의 글귀가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올 한해도 우리들은 각자 서로 다른 길을 걸었었다. 누군가는 자신의 마음속에 빛나는 별의 지도를 따라 꾸준히 그 길을 걸었을 테고, 또 누군가는 방황하며 제자리를 맴돌았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올 한해가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벨 에포크(belle epoke)’로 기억될 것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기억에도 남지 않는 무의미한 시간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드는 미련과 아쉬움들을 박노해 시인의 시 ‘잘못 들어선 길은 없다’의 시구절로 달래본다.
길을 잘못 들어섰다고/ 슬퍼하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삶에서 잘못 들어선 길이란 없으니/
온 하늘이 새의 길이듯/ 삶이 온통 사람의 길이니/
모든 새로운 길이란 잘못 들어선 길에서 찾아졌으니/
전형배
데일리F&C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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