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손으로 길을 낸 실향의 생명력, 아바이마을을 만나다
신수로로 윗마을·아랫마을로 분절
청호동을 거니는 우리의 여정은 분단의 비극과 이제 막 시작한 개발의 욕망을 함께 견뎌내는 일이다. 속초는 전국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고속버스터미널을 갖고 있다. 그 옆 속초해수욕장에는 완공을 앞둔 대기업 아파트가 단호하게 바다를 향해 서있다. ‘풍경’이 소수의 자본으로 치환되는 속초 아파트 열풍의 신호탄이 된 곳이다.
낮은 처마의 집을 지나 해변길로 가면 카페와 펜션이 바다풍경과 어우러진다. 고향 잃은 사람들이 주인 없는 바다와 모래톱에 뿌리내린 청호동은 이국의 풍경이 되어 관광객을 만나고 싶어 한다.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은 해변길 막다른 곳 옆에는 오징어 할복장이 있다. 이제는 쓸모를 다한 이 건물에서 생활력 강한 청호동 아마이의 서사를 상상해볼 수 있다.
신수로 윗마을 정도는 아니지만 아랫마을에도 맛집이 많다. 속초 젓갈을 전국적으로 알린 장인명장 ‘김송순 아마이 젓갈’, 옛날 짬뽕과 찹쌀 탕수육이 좋은 ‘대우반점’, 냉면 맛집 ‘장수면옥’, 복해장국이 좋은 ‘북청아바이’, 홍게 간장게장으로 유명한 ‘동해안 붉은대게’가 있다.
청호동은 신수로가 생기면서 윗마을과 아랫마을이 분절되는 웃지 못할 상황이 생겼다. 그 현실을 표현한 ‘아트플랫폼 갯배’를 감상한 후 설악대교를 건너 ‘갯배나루’로 향하면 우리의 여정은 끝이 난다. 짧은 지면으로 담을 수 없는 청호동의 진면목은 직접 걸으면서 온몸으로 느껴보길 권한다.
김인섭 속초문화원 사무국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아트플랫폼 갯배
아바이마을의 새로운 랜드마크
‘아트플랫폼 갯배’ 외관. 해양컨테이너로 만든 미술관은 올해 말까지 전시 일정이 잡힐 정도로 인기가 많다.
‘아트플랫폼 갯배’는 신수로 남쪽 끝에 있다. 설악대교 밑이라고 해도 된다. 아직은 건너편 갯배를 타는 곳인줄 알고 왔다가 신수로를 보고는 ‘갯배’ 위치를 묻는 사람들이 더 많이 방문하는 곳이다. ‘아트플랫폼 갯배’는 지난해 마을미술사업 공모에 당선되어 지은 컨테이너 2층 건물로 미술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신수로 때문에 남과 북으로 나뉜 청호동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남과 북으로 나뉜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아이템을 얻었다고 한다. 컨테이너도 오대양 육대주를 떠돌던 해양컨테이너를 사용했다. 부식에 강하다는 실용적인 이유도 있지만, 바다를 떠돌며 실향의 길에 올랐던 아바이마을 주민의 삶을 미술로 표현한 것이다.
올해부터 마을주민 조직인 ‘아사모’(아바이 마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미술관을 위탁 운영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속초의 풍경을 수채화로 담은 작가의 작품을 전시했고, 지난 13일부터는 ‘기자 동문성의 오래된 필름 – 그 시절 그리운 이웃’이라는 전시회를 하고 있다. 속초문화원이 주관하는 이 전시는 아사모에서 제안한 전시이다. 아사모는 전문 작가의 전시뿐만 아니라 속초의 옛 모습이 담긴 사진전시를 기획하고 있다. 일반 전시도 연말까지 모든 계획이 잡힐 정도로 인기가 많다. 전문 미술관이 없는 속초에서 공공미술의 형태로 탄생한 미술관이기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 같다.
미술관의 위치도 좋다. 설악산과 동해바다를 한 번에 조망할 수 있다. 최근에는 속초 대표 공연단체인 런 갯마당이 ‘장날’을 주제로 공연과 전시를 하는 이벤트를 ‘ 아트플랫폼 갯배’ 옆 문화마당에서 하고 있다. 앞으로 ‘아트 플랫폼 갯배’가 어떤 공간이 될지 좋은 시사점을 준다. 마을주민과 예술인이 함께 어우러지는 문화공간이 그것이다.
이곳은 월요일을 제외하고 오전 10시부터 저녁 6시까지 개방하고 있다. 2층에는 간단히 앉아 머무를 수 있는 공간도 있는데, 확 트인 동해바다 조망이 좋은 곳이다. ‘아트 플랫폼 갯배’ 인근에는 올해말까지 마을미술 작품이 추가 설치될 예정이다. 이동수 화가가 아바이마을의 시간과 삶을 표현한 작품을 설치하고, 이기범 작가는 설악대교에 ‘시그널’을 주제로 작품을 설치한다. 해안도로와 수변공원이 완성되면 ‘아트 플랫폼 갯배’는 확실히 속초의 랜드마크로 자리잡을 것이다.
정은희 속초민예총 사무국장
최근 ‘아트플랫폼 갯배’에서 개최한 ‘기자 동문성의 오래된 사진’전 개전식 모습. 마을주민과 예술가들은 이곳을 역사가 예술로 표현된 공간으로 조성중이다.
■청호동의 벽화들
아바이 마을의 벽화에는 ‘아마이’만 있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상처와 아픔, 그리움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마을. 청호동은 그런 곳이다. 하지만 곧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서 무뎌질 수밖에 없었고, 이제는 속초에서 나고 자란 자녀들의 수가 더 많아졌으니 이 상징적인 공간의 의미도 그 변화 속에서 함께 바뀌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곳에서 자란 이는 “생선 썩는 냄새로 가득했던 동네였었다”라고 회상한다. 과거 수산업 경기가 좋았을 때의 마을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수산업이 퇴조하면서부터는 관광지로 변모하게 된 듯하다. 지금도 오징어 가공 공장과 제빙공장이 있기는 하나 금이 간 벽과 어두침침한 조명이 그 변화를 실감케 하였다. 수산업과 관련된 공장들이나 생선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고, 해안도로를 따라 늘어선 펜션과 카페의 수는 세기 힘들 정도로 많았으니 말이다.
이 마을의 골목에는 벽화가 상당히 많이 그려져 있다. 벽화는 그것을 그린 주체를 중심으로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마을 주민들의 생각과 감정과 기억을 화가의 손을 통해 새겨 놓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형 마트에서 마을 정화사업의 일종으로 지원한 벽화, 마지막으로 종교 단체에서 포교활동을 목적으로 그린 듯한 벽화이다.
그나마 마을주민의 주도로 그린 벽화에서 실향의 삶이 창의적으로 표현되었다. 피난민의 행렬을 하트 모양으로 표현해 놓은 벽화, 새벽녘에 아이를 업고 장사를 나가는 아마이의 뒷모습이 그려져 있어 기형도의 시가 떠오르는 벽화, 언뜻 보면 무심한 듯한 표정인데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근심과 걱정, 삶의 고달픔이 느껴지는 벽화가 눈에 띄었다.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왜 벽화 속 노동과 삶의 중심에는 ‘아마이’의 모습만 있고 ‘아바이’는 없는 것일까? ‘아바이마을’ 청호동에 ‘아마이’만 있는 벽화는 어떤 해석을 해야 할까.
현대 예술에는 독자에 따라 작품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수용미학’이 있다. 처음 수용미학을 제기한 야우스(Hans Robert Jauß)는 “문학사는 작품과 독자 간의 대화의 역사로 쓰여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작품의 의미는 작품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 의해 재생산됨을 강조하였다. 그의 동료 이저(Wolfgang Iser)는 이런 독자의 역할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그는 독자의 능동적 역할을 밝히기 위해 ‘텍스트’와 ‘작품’을 구별했다. 텍스트는 독자와 만나기 전의 것을, 작품은 독자가 텍스트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 의미가 재생산된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저는 텍스트에는 ‘빈틈’이 많다고 보았다. 이 빈틈으로 인해 텍스트는 ‘불명료성’을 가진다. 텍스트에 빈틈이 많다는 것은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독자의 개입에 의해 언제나 새롭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빈틈은 독자가 스스로 채워 넣어야 할 부분인 것이다.
아바이 마을의 벽화는 위치와 관점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엇갈릴 수 있다. 그 의견이 무엇이든, 해석이 어떠하든, 그것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든지 그곳에는 벽화가 있고, 그 벽화에는 다양한 해석과 다양한 사람들의 개입을 통해 새로운 의미가 부여될 가능성이 열려 있다. 아바이마을에 있는 벽화를 통해 현대예술의 능동적 관람객이 되어 보는 건 어떨까. 박경원 인문학 강사
아바이 마을길에 있는 벽화는 그리는 주체에 따라 3가지로 나뉜다. 그중 마을주민이 주도한 벽화는 ‘아마이’의 삶이 예술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제 곧 사라질 예정의 옛집에 그려진 벽화. 익숙한 캐릭터가 정감어린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갯배나루 문화광장
분단과 개발의 역사가 혼재된 공간
청호동의 골목은 좁다. 지붕은 낮고 집들은 서로서로 붙어있다. 얼마 전까지는 담벼락이 없는 집들이 더 많았다고 한다. 이북식 명칭의 식당들이 군데군데 보인다. TV에 방영된 집을 알리는 원색의 간판과 큰 글씨가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괜찮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낯선 이북 식당의 음식들은 거부감보다는 호기심이 먼저다. ‘아바이마을’이라는 이북식언어는 오히려 재미요소다. 신기한 먹거리를 체험하고 탁 트인 드넓은 동해바다가 펼쳐진 이 동네는 속초의 대표 관광지역이다.
이 지역에 관광객들이 몰리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드라마 ‘가을동화’와 예능프로 ‘1박2일’에 동네가 소개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동네에 오고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삶의 방식과 풍경이 바뀌고 동네의 모습도 조금씩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최근 청호동 남쪽으로 보면 초고층 아파트가 서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속초에서 청호동만큼 상징적인 동네가 또 있을까. 청호동은 한국의 근현대 60년 역사가 고스란히 살아있다. 분단의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실향민 정착촌이자 TV프로그램에 소개되면서 속초 여행의 필수 코스가 된 동네. 시간과 공간을 이어주는 갯배가 있고 그곳을 건너면 아바이순대와 함흥냉면 등 이북 음식이 전해 내려오는 로컬 푸드가 있는 곳. 최근 속초 개발의 정점에 서있는 곳, 청호동은 분단의 아픈 역사와 개발의 역사가 혼재되어 있는 동네이다.
갯배나루가 있는 청호동 초입에는 작은 공연 공간이 있다. 공원 같기도 하고, 전시 공간 같기도 하다. 중앙에는 원형 벤치가 있고 그 주위로 반원형 벽들이 둘러싸고 있다. 하나씩 살펴보면, 한쪽으로 북청사자놀음 탈 조형물과 깃대가 벽에 서있다. 벽에는 마당에서 북청사자놀음 공연을 하는 모습의 사진이 있다. 또 다른 벽 앞엔 수레를 끄는 황소 조형물이 있고 그 뒤 벽엔 피난 행렬의 모습으로 보이는 흑백사진이 있다. 다른 한쪽에는 어민들이 고기를 파는 시장의 모습을 담은 사진벽화, 반대편에는 ‘청호’라고 적힌 배와 어민들의 모습을 그려놓은 벽화가 있다. 중간 중간 사람들이 앉을 수 있도록 긴 대리석 의자도 마련되어 있다.
우리는 이 공간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속초의 역사? 속초의 정체성? 속초의 특징? 단편적인 사진만으로는 이 공간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조형물들 옆에 아무렇게나 버려져서 쌓인 쓰레기더미가 현재 이 공간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곳은 어쩌면 짧은 시간에 빠르게 변화한 청호동의 단면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청호동은 실향민들의 아픔이 서려있는 곳이지만 동시에 관광지이다. 실향민의 아픔은 관광객들에게는 잠시 소비되는 구경거리로 전락한 것 같다. 요즘 세대에게는 그들의 아픔이 더 이상 공감되지 않는다. 청호동과 갯배에 관한 이상국 시인의 시가 현재 이 곳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 같다. 최윤복 문화활동가
갯배2
이상국
저렇게 푸른 동해도/ 청초호에 들어오면 썩을 수밖에 없다/ 흐르는 물 길 막히면/ 우리들 그리움 또한/ 이까 복장처럼 새까맣게 멍들 수밖에 없다/ 갈매기들 흰 배 뒤집으며 끼룩거리는 여름/ 낯선 관광객들은 갯배를 타고 사진을 찍는다/ 우리들 분단의 고통이/ 피서지의 추억이 되고/ 떠도는 삶이 구경거리가 되는 동안/ 썩어가는 청초호에 몸을 담그고/ 우리는 주먹으로 슬픔을 틀어막는다.
금강대교에서 바라 본 갯배나루 전경. 다닥다닥 붙은 골목의 흔적과 이북식 명칭의 식당이 실향의 삶을 증언하고 있다.
갯배나루 문화마당. 전시와 공연장 등의 모습은 보이지만 정확히 어떤 공간인지 가늠하기 힘들다. 실향의 아픔이 서려있지만 동시에 관광지인 청호동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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