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항의 개항으로 속초는 동해안 제일의 신흥도시라는 별칭을 안게 되었다. 1938년 5월 10일자 동아일보 양양 특집판에서는 10여년 전에는 불과 10여 가구가 살던 어촌이 현재 8백여 가구에 이르러 빠른 시일 내에 읍으로 승격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속초항 개발을 계기로 속초는 본격적인 항구도시로 도약하기 시작했다. 이미 개항 전인 1930년 6월 26일 속초항 인근 매립지에 속초시장이 개설 인가되어 3일과 8일, 5일장으로 열렸다. 1935년 지금의 청호동 지역은 정어리공장 40개가 들어설 공장지역으로 지정되었다. 1935년에는 우편소가 들어왔고, 1937년 2월 26일 속초어업조합이 대포항에서 속초항으로 이전하면서 속초어업조합으로 이름을 바꿨다. 어업조합은 속초리 76번지로 이전했는데, 지금의 동명항 입구 삼거리 도로에 편입된 지점이다.
1937년 인구 증가에 따라 영랑소학교가 3학급 규모로 신설되었으며, 4년 후인 1941년 2학급이 증설됐다. 1937년 12월 동해북북선 간성-양양구간이 개통되어 속초역이 들어섰다. 이렇게 하루가 다르게 도시의 규모가 커지면서 1938년 동아일보 기자의 예측이 만 4년만에 눈앞의 현실로 실현되었다.
1942년 10월 1일 드디어 속초면은 속초읍으로 승격됐다. 읍제를 처음 실시한 10월 1일에는 읍사무소 앞마당에서는 축하 행사가 거행되었다. 그리고 10월 23일에는 속초읍민 축하행사가 열렸으며, 이틀 후인 25일에는 읍민체육대회가 속초공설운동장에서 열렸다.
1930년대 속초의 약진은 속초항 개발로 수산업이 부흥하면서 시작되었다. 또한 전 세계 단일어종으로 최고의 어획고를 기록한 동해안 정어리의 어획도 큰 영향을 받았다. 1930년대 군국주의 침략전쟁을 시작한 일본으로서는 경화유를 만드는 동해안의 정어리가 큰 군수물자였다. 일본의 대기업이 정어리 기름을 독점했고, 조선의 자본가들도 너나없이 정어리 어획과 가공에 뛰어들었다. 속초에 당시 일본 최고의 재벌인 미쓰이(三井)그룹이 설립한 종연조선수산의 직영공장을 비롯해 일본인의 온유비(鰮油肥) 공장이 다수 있었다. 1937년 대포수산조합 관할 온유비(鰮油肥)공장이 80여개에 달했다.
조선인의 10%도 안 되는 일본인들과 일부 조선인 사업가들이 건착망과 수조망 어업 등 어업면허를 대부분 독점했다. 열악한 선박과 면허를 갖고 전통적인 재래조업방식에 머물렀던 지역 어민들은 상대적으로 경쟁이 되지 않았다. 수산업계의 큰 손이었던 사업가들은 전통적인 어민이 아니었다. 그들은 동해안의 정어리 풍년에 전국에서 몰려들었으며, 돈이 되는 사업이라면 모든 사업 분야에 손을 뻗쳤다.
속초항 개항과 수산업 활황으로 속초의 도시 상업도 부흥했다. 1938년 양양 소개판 인물 소개 정보와 하단 광고를 보면, 당시 속초에서 수산업을 비롯해 수산물 중매 및 유통업, 온유가공공장, 해운업(회조업)과 운수업이 성행했으며, 잡화점, 여관, 양조장, 목재판매상, 의원, 양복점이 들어섰다. 속초와 양양읍에 고급 조선 요릿집도 문을 열고 영업을 했었다. 1938년 동아일보 양양 특집판 하단 광고에는 두 곳의 요릿집 광고가 실렸다. 양양읍에는 최남식씨가 운영하는 명월관, 속초항에는 한성관이 있었다. 특이하게도 신문 광고면에 사람 얼굴이 실린 것은 두 요릿집의 기생과 주인장 얼굴 사진이 유일하다. 두 곳 모두 8명씩의 기생 이름을 올렸으니 그리 작지 않은 규모의 식당으로 보인다.
1938년 3월 16일자에는 양양지역이 청어가 많이 잡혀 요정(料亭) 경기가 활황이라는 기사가 보도될 정도로 수산업의 활황 덕에 고급요릿집이 성업을 한 것으로 보인다.
양양 청어 풍획에 요정(料亭) 경기 활황
[양양] 양양의 대포, 속초, 아야진, 광포 등지에는 전고 미증유의 청어의 풍획으로 흑자경기를 보이고 있어 요리집과 색주가들만 실고 난다는데 속초 모음식점에 최고 주대 1백8원을 내는 자들이 빈번하여 여간 10원 이내 술주렴꾼들은 문안도 드리지 못할 형편으로 주야를 계속하여 새어나오는 장구소리와 아가씨들의 가날픈 노래에 그야말로 별건곤(별천지)이라 한다.
<1938년 3월 16일 동아일보 6면>
이렇게 속초항이 약진하던 같은 시기에 양양군의 농촌지역은 궁핍하다 못해 기아선상에 허덕이고 있었다. 1932년 4월 22일자 석간 조선일보에 ‘기아지 대답사 강원도편’에 양양의 기아현실이 보도되었다.
“양양군은 총인구 1만2백호 6만2천여 인구가 거주하는 중 그 2할인 일만수천명이 기근에 빠져 신음하고 있는 참상이라고 한다. 원래 만성적 농업공황으로 병들고 좀먹은 농민생활인데다가 작년 가을의 풍재 상해 등 재해는 치명적 파탄 원인이 된 것이다. 이곳은 다른 지방에 비하여는 작년 가을의 재해는 심하지 않았으나 서면, 죽왕면, 현북면 등 지역은 수확이 전무한 곳이 많고 또 7할 이상의 감수지가 적지 않아 혹심한 재해를 당해서 지역 일대의 기근 참상은 실로 형언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참담하다. 서면과 현북 두 면은 영서의 기근 지역인 인제와는 접경지로 산악이 중첩하여 주민의 대부분이 화전을 해서 근근연명해오던 지방으로 지금 주민의 반수인 7천명 이상은 초근목피로 죽지 못해 연명하고 있다고 하며, 남부여대하여 유랑하는 자도 1천여명에 달하고, 초근목피도 구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대로 앉아서 되는대로 세상에 맡겨두지 않으면 안될 것과 부황에 걸려 침통한 신음을 하는 자가 많아 차마 눈으로 바라볼 수 없는 허다한 참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1932년 4월 22일 조선일보 석간>
1931년 양양군을 비롯해 조선 전체가 최악의 흉년을 기록했다. 자연재해만이 아니라 1930년 세계 대공황으로 곡물가격 폭락과 불경기가 같이 겹쳤다. 1932년 2월 고성군에서는 기아민 가족 5명이 유랑 도중에 굶어죽은 채 발견되었고, 회양군에는 굶주린 식구 5명이 고성으로 아는 사람을 찾아오다가 굶주려 두 살 난 어린아이만 살아나는 일도 있었다.
1925년에도 양양 산간이 농민들이 풍수해로 기근을 이기지 못해 북간도로 떠난다는 보도가 있었으며, 1929년부터 1930년대 하반기까지 해마다 풍수해가 반복되었다. 결국 궁핍한 농민들은 떠나거나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1932년 3월 조선일보에는 양양군에서는 계속되는 흉작으로 농촌경제는 피폐해진 상황에서 어촌지역에서 청어어획 대금이 넘쳐나면서 영향을 받아 토지매매가 많이 늘었다고 보도했다.
동해안의 풍수해 피해는 1936년 병자년 수해로 최고조에 이르렀다. 1936년 8월 28일 새벽 4시 태풍과 호우로 남대천 제방이 무너지면서 양양읍 일대가 쓸려 내려갔다. 죽거나 실종된 사람만 5백50명이 넘었다.
같은 양양군에서도 농촌은 붕괴하고 어촌 경기는 상대적으로 호황을 누리면서 사람들이 속초항으로 몰려들었다. 속초항이 개발되면서 인구가 몰리면서 주택도 부족하고 땅값이 뛰었다. 그 와중에도 수산업을 금맥으로 알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돈을 싸들고 동해안으로 몰려들었다. 농촌에서 밀려나온 값싼 노동인력 덕분에 일본인뿐만 아니라 몇몇 조선인 사업가들도 큰 돈을 만지게 된 것이다.
정어리 어획으로 활황을 이룬 속초항에는 수천명의 노동자들이 먹고 살았지만, 남녀노소는 물론 어린 아이들까지도 매일 1원 이상에 품팔이를 하게 되어 갓난아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하는데 매달렸다. 당시 신문에는 새벽 5시부터 영하 25도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부둣가에 나와 일하는 부녀 노동자들 사진이 게시되기도 했다. 정어리를 가공하는 온유비공장의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로 저임금에 시달려야 했다.
1934년 일제의 탄압으로 양양농민조합이 붕괴되어, 농민조합과 궤를 같이하는 대포의 어업조합과 노동조합도 더 이상 활동하지 못했다. 더구나 일제의 군국주의 침략전쟁이 시작된 1930년대 후반에는 신문들조차도 조선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속초의 비약적인 발전을 다룬 기사는 넘쳐나도, 어민들과 노동자의 어려운 현실을 다룬 기사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엄경선 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동아일보 1938년 5월 10일자 양양소개판 하단에 실린 조선요릿집 명월관과 한성관 광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