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세’에 관한 아주 촌스러운 이야기를 하겠다. 모두가 경험했을 어릴 적 추억이다. 지금은 추억이라고 말하지만 그 당시는 긴박감 넘치는 순간이요, 가슴이 콩닥거려서 심호흡을 몇 번이나 해야만 넘어갈 수 있는 긴장된 순간순간이었다. 고향 뒷동네 황골을 가려면 먼저 검정고무신부터 벗어서 두 손에 단단히 움켜쥐어야 했다. 혹시 뛰다가 신발이 벗겨지기라도 하면 그보다 더한 낭패가 없었다. 전속력으로 달려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 잘못하여 망보는 그 동네 파수꾼 아이한테 걸리면 감당 못 할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길은 왕복 길이었다.
황골마을을 지나야 칡뿌리를 많이 캘 수 있는 산골마을까지 갈 수 있었다. 피할 수 없는 마의 구간이다. 돌아올 때가 더 큰일이었다. 어깨에 걸러 멘 칡뿌리의 절반은 고사하고 거반 다 빼앗기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이 뻔했다. 알통 밴 암놈 칡뿌리를 통행세로 다 빼앗기고 홀쭉한 수놈 칡뿌리만 들고 돌아가기 다반 수였다. 많이 얻어맞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그에 대한 앙갚음은 그 애들이 우리 동네 지나갈 때 고스란히 갚아주게 될 것이었다. 해마다 마을 냇가 둔덕에 버드나무 많은 행경내에서 열리는 동리대항 배구대회의 피날레(finale)는 그야말로 피날 때 끝났다. 흥겹게 시작된 친선배구경기는 경기규칙에 대한 국제심판이 없는 까닭에 네트를 건드렸느니 안 건드렸느니, 홀딩을 했느니 안 했느니, 그리고 공이 터치라인 안쪽에 떨어졌느니 바깥쪽에 떨어졌느니 서로 우기다가 육탄전으로 돌입했다. 팔뚝 굵고 힘세고 덩치 큰 떡대가 이겼다. 당시에는 초월법인 주먹이 법보다 항상 우선했기 때문이다. 행여 이기기라도 하면 동네 엉아들은 호기어린 승전가를 반년은 우려먹었다.
정월대보름 쥐불놀이 깡통돌리기는 위험천만한 육박전이었다. 보름 전부터 깡통을 주어다가 못으로 돌아가며 일일이 구멍을 내야 했다. 구멍의 수와 크기에 따라 소나무 관솔에 불붙이기 용이성과 지속성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물론 깡통의 크기는 깡통 돌리는 운전자의 덩치와 비례했다. 이집 저집 다니면서 얻어온 오곡밥과 나물을 바가지에 넣어 비벼먹고는 곡교천을 건너 벌판마을까지 원정을 나갔다. 가난과 질병으로 육아사망률이 높던 시절이어서 산이 없는 벌판 마을 피란민촌은 아이 시신을 가마니에 싸서 지게로 밤에 몰래 우리동네 가까운 산에 애장을 하는 바람에 어른들 사이에서도 서로가 질시했었다. 그러니 대보름날 깡통돌리기는 돌팔매질이나 육박전까지 갔었다. 가난한 시절 왜 그렇게 아웅다웅 했는지 이해가 안 간다.
지금은 그런 일이 없겠지만 필자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책상마다 어김없이 삼팔선이 그어져 있다. 나라도 두 동강인데 학교 책상도 두 동강으로 선이 그어져있다. 옆에 짝과 평화시대에는 괜찮지만 냉전시대에는 불가침 원칙이 엄격했다. 또르르 연필과 지우개라도 굴러서 적의 진영에 들어가면 귀환이 불가능했다. 유일한 데탕트는 급식으로 배급되는 옥수수 빵이었다. 떼어서 친구에게 건네주면 그것이 금방 화해무드로 변화되는 묘약이었다.
최근에 헛소문을 들었다. 필자가 단호히 의도적으로 헛소문이라고 단정하는 이유는 결단코 그런 이야기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에 근거 없는 이야기로 몰아가려는 생각에서 하는 말이다. 동서고속화철도 노선확정이 되면서 헛소문이 돌고 있다고 들었다. 종착역사는 속초에 들어서고 기대했던 차량기지도 해당 지자체에 배정되지 않았으니 군 지경으로 철도노선이 지나가는 것을 반대한다는 헛소문 말이다. 만에 하나 그런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초등학교 때 우리 동네 밟고 학교에 못 가게 하겠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초등학생들은 그럼 우리 동네에 기차역을 이용해 고속철 못 타게 하겠다고 대응한다. 그야말로 유치한 이야기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 옛날 배고픈 시절 그렇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마음 졸이며 지키려던 칡뿌리 싸움이 연상된다. 지역의 역사적 숙원사업이니 마음을 합했으면 좋겠다.
최철재
경동대 교수·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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