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속초수협부터 영랑동 해안까지의 길은 속초의 근현대사를 걷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또한 속초의 본래 맛이라고 할 수 있는 소울푸드의 길이자, 골목마다 근대건축을 만날 수 있는 옛 도심의 공간이기도 하다.
먼저 그 시작은 구 속초수협이다.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속초 수산업의 역사를 간직한 속초수협 건물은 속초 발전의 주역임을 힘겹게 항변하고 있다. 예술가와 향토사가들은 이곳에서 속초의 정신과 르네상스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갯배를 타기 위해 줄을 기다리는 인파를 바라보며 동명동까지 해안길을 걷는다. 초장맛 짜릿한 물회와 싱싱한 자연산 회, 국내 제일의 물곰탕과 생선찜 등 각각의 실력으로 사랑받는 맛집이 즐비하다. 관광객에게 입맛을 맞추는 곳이 아니다. 70~80년대부터 까칠한 속초시민의 입맛을 끌고 오다보니 명성을 얻은 집들이 많다.
포구의 정취는 덤이다. 금강대교 옆을 스치며 바닷길을 감상하다 보면 난전을 만나게 된다. 오징어와 양미리 등 계절별미를 맛볼 수 있다. 정갈하지는 않지만 투박한 정이 집집마다 개성있게 자리잡고 있다. 그 건너편에는 수복탑이 있다. 수복탑은 실향민 도시 속초의 상징이다. 수복탑에서 영랑동 해안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이다. 동명항과 영금정 바닷길로 가는 방법도 있지만 동명동과 영랑동 골목을 권한다. 1구 시장과 근대건물을 드문드문 만날 수 있는 골목길을 권한다. 군산이나 인천에 비할 수 없지만 1구 시장터, 밍키 오락실 건물 등 수복 후 속초 제일의 번화가를 상상하며 걸을 수 있다.
골목 끝에서 바다로 향하면 속초의 핫플레이스라고 할 수 있는 영랑동 포차와 영금정을 만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때 속초항 건설을 위해 부셨다는 영금정은 지금도 신비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으니 과거는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상상을 할 수 없다. 작가와 문화활동가, 인문학 강사가 이 길을 걸었다. 각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1구 시장터와 영랑동 골목, 성황당과 수복탑 광장의 모습은 흥미로운 발견이다.
김인섭 속초문화원 사무국장
※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문화방앗간, 속초 1구 시장 터
시장은 사라져도, 인심은 남아 있네!
방앗간 이름 치고는 특이하다. 영랑작은도서관 앞 사거리에서 장사동 쪽으로 가는 길에 있는 문화방앗간 이야기다. 오래된 건물에 낡은 간판, 전화번호조차 두 자리 국번을 그대로 쓰고 있다. 사장님은 인제 출신으로 제대 후 낙산에서 뱀 장사를 했다. 장사가 웬만큼 되었는데 뱀을 보기에 불편한 사람들이 많아 설악산 인근으로 쫓겨났다. 그 후 뱀 장사를 그만두고 문화방앗간을 시작해 지금까지 30년째다.
도대체 무슨 뜻으로 방앗간에다 문화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이전에 하던 사람이 지은 이름이란다. 그 깊은 뜻을 영영 알 수 없게 되었다. 놀러왔던 이웃주민은 자신이 쉰 살이고 어렸을 때부터 봤으니까 이 방앗간도 그쯤은 되었을 거라고 한다.
지금은 가을걷이나 해야 손님이 좀 있는 정도이지만 예전에는 손님이 많았다. 추석 때는 긴 줄을 섰다. 차례를 지내고 자식들 손에 들려 보낼 고춧가루니 참기름이 문화방앗간에서 만들어졌다. 손님이 많았던 것은 영랑동이 동명동과 함께 속초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속초가 시로 승격되어 동제가 실시되기 전, 영랑동은 속초리 1구였다. 속초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사는 곳이니 당연히 시장이 있었다. 문화방앗간 뒤편으로 오래된 집들이 만든 오래된 골목을 지나면 주택이 둘러싸고 있는 공원이 있다. 이곳이 바로 ‘1구 시장’이라고 불렸던 곳이다.
비어있는 쌀집, 40년째 영업 중인 광산철물을 제외하면 시장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때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공원에 모여 있었다. ‘우리 딸이 몇 살 때, 내가 시집 왔을 때, 내가 이사 왔을 때, 우리 친정 엄마가’ 북적거렸던 속초 제일의 시장은 각자의 기억을 꺼내 맞춰보는 과정을 통해 복원되었다.
1구 시장은 미군정이 끝난 이후 생겼다. 지금 공원터보다 컸던 시장은 쓰레트 지붕이 있었고 그 아래 좌판을 깔았다. 물론 건물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생선, 정육, 포목, 쌀, 부식 등 팔지 않는 것이 없었다. 영랑동에 국군 1군단과 미군부대가 있어 군인 손님들도 많았다. 친정 엄마가 강현면에서 고춧가루를 이고 와서 군인에게 팔기도 했단다. 긴 줄을 서서 물을 사먹었다는 기억은 모두 가지고 있었다. 양동이 단위로 팔았는데 정확한 가격을 기억하는 이는 없었다.
사람들을 먹이고 입히던 시장은 속초의 중심이 중앙동으로 옮겨가면서 활기를 잃어갔다. 시장이 없어진 시기를 기억하는 이가 없는 걸로 보아 그 속도는 느렸던 것 같다. 30년 전인 1987년, 시장이 다시 열릴 줄 알고 이사를 왔을 때 장사하는 집이 두어 곳밖에 없었다는 것이 가장 정확한 기억이다. 2000년 정육점이 문을 닫으면서 지금은 시장의 외곽이라 할 수 있는 문화방앗간과 광산철물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1구 시장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매일 같이 모여 먹을 것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지나가는 길이라도 이들을 만나게 된다면 ‘여기가 옛날 시장 자리라던데…’라는 말만으로 파도처럼 넘실대는 시장의 기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무용 작가
1구 시장 터에서 만난 주민들. 영랑동 일대는 아직 행정 이름을 부여받지 못하던 시절 가장 많은 사람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시장은 사라졌지만 주민들은 그 터에서 끈끈한 정을 이어가고 있다.
문화방앗간 전경. 지금은 손님이 많이 줄었지만 예전에는 가장 번성했던 방앗간 중 하나였다.
■동명동 옛 골목길
세상에 하나뿐인 골목
속초등대와 영금정이 있는 동명항은 오래전부터 속초의 대표 관광코스다. 파도가 부서지는 갯바위에 앉아 시원한 바닷물에 발을 담그는 것만으로도 그날의 더위는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 경치 좋은 바다에서 즐기는 신선한 회는 보는 재미에 먹는 재미를 더한다.
동명항부터 해안길을 따라 등대해변까지 걸어보자. 도로 양편으로는 게집, 회집이 길게 늘어서 있고,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경치 좋은 카페들, 바닷바람을 맞으며 신선한 안주를 먹을 수 있는 포장마차 거리까지. 여행객들의 입맛에 맞게 거리는 점차 변하고 있다. 하지만 좁은 도로는 자동차들로 붐비기 시작했고 그 틈을 지나가려는 사람들로 인해 아슬아슬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식당 입구에는 번호표를 들고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줄도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바다마을 속초의 여름풍경 중 하나이다. 이 왁자지껄한 해안도로를 담 하나 두고 속초의 오랜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동네가 있다. 바로 영랑동 옛 골목길이다.
동네 어귀에는 일본식 근대건축 양식의 건물이 반갑게 맞이한다. 예전부터 식당이었다고 한다. 집 앞으로 난 작은 골목길을 따라 걸으면 1층은 오락실과 2층은 만화방으로 쓰였던 건물이 있다. 나무로 된 미닫이문과 슬레이트 기와, 나무 기둥에서 오랜 세월이 묻어난다. 골목길은 조용하고 한적하다. 길을 따라 산들산들 바람이 불어온다. 집과 집을 이어주는 전깃줄은 하늘을 가로지고 있다. 정방향에 블록이 잘 나뉘어진 깔끔한 도시의 풍경과는 대조되지만 골목을 따라 걷다보면 동네의 이야기가 있고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걷다 보니 어린 시절 골목의 모습이 그려진다. 잘 가꾼 가지와 토마토가 열린 집 뒤편으로는 어르신들이 그늘에 나와 부채질을 하며 담소를 나누고 계실 것만 같다. 골목 저편에선 동네 꼬마들이 뛰어놀고 있을 것만 같다. 작은 집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고, 굽이굽이 골목이 있는 동네라면 그곳은 언제나 꼬마들의 차지였다. 때론 놀이터로, 때론 축구장으로, 상상 속에서 골목의 변신은 무한대다. 지금도 “00아 놀자”로 하루가 시작해 “00아 들어와서 밥먹어”로 끝나던 어린 시절의 추억들. 함께 놀기에 하루는 너무나 짧았다.
걷기 좋은 동네가 여행하기에도 좋은 동네가 아닐까? 여행을 온 인파가 휩쓸고 간 뒤 허전함만이 남는 거리가 아닌 세월의 한적하고 고즈넉한 골목길, 30년 전통이나 원조라는 글귀가 적힌 간판은 없지만 그 시간을 보낸 집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동네. 사라지고 나면 다시 지으려고 해도 지을 수 없는 정이 남아 있는 그런 골목길. 그곳을 한번 걷기를 추천한다.
최윤복 문화활동가
걷기 좋은 동네가 여행하기에도 좋은 동네가 아닐까? 동명동 골목 곳곳마다 예쁜 화분이 정리되어 골목길을 환하게 비춘다.
동명동의 근대식 건물 앞에서 시민기자들의 기념사진.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공간이 있다는 점이 고맙고 반갑다.
■동명동 성황당, 수복탑
시민 희망 소통하는 광장 복원 꿈꾼다
조선 중기 문신인 송강 정철은 그의 글 <관동별곡>에서 ‘바람과 구름(선정을 베풀 기회)을 언제 얻어 흡족한 비(선정)를 내리려는가? 그늘진 벼랑의 시든 풀을(도탄에 빠진 백성) 다 살려 내려무나.’라며 자신의 소망을 적어내었다. 자연물 중에서 해와 구름 그리고 비는 농경생활을 영위했던 우리 조상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정철도 선정을 펼치고 싶은 마음을 구름과 비라는 소재를 통해서 자신의 글에 적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어촌은 어땠을까?
동명동 등대 근처 산자락에 동명동 성황당이 있다. 이전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성황신이 함께 모셔져 있었으나 현재는 할아버지 성황신만을 모시고 있다고 한다. 매년 단오 때 별신제 풍어굿이 열렸고, 속초를 대표하는 설악문화제 때 성황제도 이곳에서 열렸다. 원래는 ‘성황산’이라고 불리는 속초 등대 주변 숲 속에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돌산 발파와 등대 설치 등을 이유로 인근 산(동명동 36번지)으로 옮겼다가 6.25전쟁 당시 소실되어서 1950년대에 지금의 위치(동명동 117번지)에 새로 건립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샤머니즘, 토테미즘, 애니미즘은 ‘계몽(啓蒙)’이라는 미명하에 배격, 규탄 받아 마땅한 것으로 치부되어 왔다. 한자어 계몽은 ‘열 개’자에 ‘어두울 몽’자를 사용한다. 그 ‘어두움’이라는 단어의 범위는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누가 정의할 수 있는 것일까?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자들은 미신과 맹신을 배격했으며 이성을 찬양했다. 그래서 이성적 사고에 의한 정념의 통제, 과학과 기술에 의한 자연의 정복, 보다 책임 있고 민주적인 통치형태로 전제정치를 대체하는 민주주의의 발전 등이 모두 계몽의 형태로 이해되었다. 그러다보니 이성에 대한 맹신과 과학발전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인간은 신화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다른 신화의 세계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러니 ‘신화’를 떨쳐버리려고만 하지 말고 조금 다르게 접근해 보는 건 어떨까? 즉, 삶의 목표와 행복을 추구하는 원래의 이성 기능을 활성화하여 인간의 삶 그 자체에 집중을 해 보자는 것이다. ‘굿’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성황당에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면서 삶의 문제점과 원인을 분석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직접 민주주의의 장’으로서의 형태가 바로 성황당의 또 다른 기능은 아니었을까?
성황당의 또 다른 기능이 이루어지고 있는 공간이 있다. ‘수복탑’과 ‘해양경찰서 전용부두’가 그곳이다. 속초해양경찰서 전용부두와 경비함정에서는 매년 실향민을 위한 선상 합동위령제가 열린다고 한다. 예전에는 수복탑 앞에 사람들이 모여 결속을 다지고 미래를 꿈꿨다면 수복탑 앞의 광장이 사라지면서 이제는 근처 부두가 그런 소통의 공간이 된 것일까? 길을 만들기 위해 사라진 수복탑 광장의 상징성과 그 장소가 주는 의미가 그대로 유지되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더 많은 장소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것이 더 좋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광장’이 더 많아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민주주의는 ‘광장’에서 시작된다. 그런 ‘광장’으로서의 기능을 했다고 생각되는 성황당과 수복탑, 그리고 앞으로 속초에 더 많이 생겨날 또 다른 ‘광장’을 기대해 본다.
박경원 인문학 강사
동명동 성황당. 성황당은 마을의 복은 부르고 액을 막는 공간으로 주민의 염원이 소통하는 또 다른 광장이다.
수복탑 로타리가 생기기 전 공사 모습. 수복탑은 속초의 상징공간으로 광장의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사라지고 탑만 쓸쓸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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