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이후 월남한 피난 실향민들이 정착해 먹고 살 수 있었던 속초시. 한때는 속초주민의 70%가 실향민 출신이라는 통계도 있었다. 그 많은 실향민들이 정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속초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함경도 해안가에서 고기잡이에 종사하던 피난 월남인들은 속초항을 거점으로 남한생활에 보다 쉽게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속초항은 실향민들의 젖줄과 같은 존재였다.
양양군 도천면 속초리의 작은 어촌부락이 1930년대 속초항으로 개발되면서 인구가 늘어 도시가 형성되어 면소재지가 되었고, 곧이어 읍으로 승격했다. 그리고 한국전쟁 중 수복되어 전쟁이 끝난 지 10년 만인 1963년에 시로 승격하게 되었다. 속초항이 동해안 최고의 어업전진기지로 개발되기까지 많은 이들의 피눈물 나는 희생과 노력이 함께 있었다. 그 출발은 1929년이다. 1929년 3월 24일자 조선일보에는 양양 속초리에 축항기성회가 조직되어 활동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처음으로 보도되었다.
양양 속초리 축항기성회(築港期成會) 활동
도평의회(道評議會)에서도 가결, 미구(未久)에 실현될 줄 기대
양양군 도천면 속초리는 양양에서 어산지(漁産地)로 제1위에 있고 현재 2백10여호의 대부락으로 미시령도로의 기점이 되어 산업상 교통상 어디로 보든지 전 양양에 있어서는 장래 발전의 희망이 다대(多大)한 곳인데 지난 1월 15일에 이곳 유력자(有力者)들은 회합하여 축항기성회를 조직하고 사업의 계획과 규약 등을 제정하고 5개년 사업으로 지금 맹렬한 활동을 하는데 강원도 당국에서도 이에 상당한 주목을 하여 지난번 평의회에서도 도(道) 공익의견(公益意見)으로 가결하여 머지않은 장래에 속초의 축항은 실현되리라더라.(양양)
축항기성회는 강원도를 찾아가 조속한 사업 추진을 촉구하는 한편, 속초항 수축의 필요성을 널리 홍보하고 나섰다. 기성회에서는 개발 전 속초항 흑백 풍경사진을 인쇄한 사진엽서를 제작해 배포하기도 했다. 엽서에는 ‘양양명소, 이상적 축항 시급, 속초항’이라는 홍보문구도 적혀있다.
주민들의 갈망과 유치활동만으로 속초항 개발이 쉽게 진행된 것은 아니다. 1930년 7월 18일 초유의 태풍 피해가 없었다면 속초항 개발은 더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역설적으로 이 태풍으로 동해안 어민 수백명의 목숨을 앗아갔지만, 그 영향으로 속초항 개발이 앞당겨진 것으로 보인다.
1930년 7월 18일과 19일, 양일간 비바람을 동반한 태풍 피해는 우리나라 최대 해난사고를 가져왔다. 강원도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는데, 내륙지방은 영월군 일대가 초토화되었고, 동해안 해안 일대에서는 큰 해난사고가 발생했다. 행방불명을 포함한 사망자는 양양군이 399명, 고성군은 619명이 넘었으며, 강원도 전체가 1,518명에 달했다. 대포항에서도 모두 78명이 사망해 7월 28일부터 30일 아침까지 사흘간 조난자 명복을 비는 수신제(水神祭)를 지내기도 했다.
그해 8월 21일 가장 피해가 큰 고성군 고성면어업조합과 양양군 도천면어업조합, 강원도수산회 공동으로 총독부에 청원서를 제출해 정부의 복구지원과 방파제나 선류장수축을 촉구했다. 청원서에 나온 태풍 피해의 현장은 처참한 지경이었다.
1930년 7월 28일 태풍 피해가 가장 심대한 곳은 강원도 연해이며, 때마침 고등어연승어업 성어기로 그 피해가 더 컸다. 사망자와 행방불명자가 731명이며, 어선 파손이 1,510척, 어구와 제조공장 유실 파괴 손해액 56만2천여원으로 미증유의 재앙이었다. 고성군 봉건리(逢建里) 한 부락은 133명이 수장되었으며, 어선의 절반을 잃었다. 고성군 대진리, 저진리, 양양군 속초리, 오호리도 이에 버금가는 참상을 겪었다. 강원도 전 연안에 이재민이 5천명으로 가족까지 합하면 2만명 이상이다. 유족은 이웃들에게 의탁하고 있으며, 생존자는 어선이 없어 굶어죽기 직전의 상태이다. 어민들은 투자할 능력이 없을 뿐 아니라 올해는 대우(大羽, 큰멸치)와 정어리 값까지 폭락해 자력복구는 더욱 어려운 일이 되었다.
<1930년 8월 23일 매일신보 3면 보도기사 발췌 정리>
속초리 속초항도 큰 피해를 입었다. 1931년 7월 16일 강원도지사가 조선총독부에 보낸 ‘속초항수축공사 국고보조 신청’ 서류에는 지난해 발생한 태풍 피해를 근거로 속초항 축조사업의 긴급성을 제기했다. 문서내용의 일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양양군 도천면 속초리 속초항은 강원도 동해선의 주요 어항으로 근해 어족 자원이 풍부하여 대형 선박 수용하기에 충분한 면적이나 수심이 낮아서 일부 작은 선박들만이 만(灣)으로 들어올 수 있다. 그래서 황파(荒波)를 피할 수 있는 피난항으로 역할을 하지 못해 어민들은 항상 난파의 위험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 작년 여름 폭풍으로 속초항에 적을 둔 선박 50척과 다른 지역에서 들어온 통어선(通漁船) 9척, 총 59척 중에 간신히 3척만 남고 모두 난파되어 승조원 사망자가 50여명에 달하는 참상을 빚었다. 현 상태에서 황파를 피하려면 멀리 장전항이나 주문진항으로 피난을 가야만 한다. 이러한 불편으로 어족자원은 풍부함에도 속초항에 들어오는 통어선이 적다. 이렇듯 수산업 발전 저해가 막대하여 지역 주민들은 속초항 수축공사를 빠른 시일 내에 이뤄지기를 열망하고 있다. 그러나 열악한 지방재정으로는 공사비를 감당할 수 없이 공사가 이뤄지지 못해 지역발전에 큰 장애가 되고 있다.
<국가기록원 DB ‘1931년 속초항수축공사 국고보조 신청’에서 발췌 정리>
1931년 8월 2일자 매일신보에는 속초항 수축공사는 3개년 사업으로 당국의 허가가 이뤄져 실시하게 되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보도와는 달리 사업 진척이 없자 기성회는 강원도지사에게 속초항 수축을 조속히 추진해달라고 진정서를 다시 제출했다. 그러나 결국 1년이 지난 1932년 9월에서야 사업이 확정되었다. 국비 75%에 지방비와 주민부담 25% 조건이었다.
양양군은 주민 부담 3만원을 만들기 위해 면장회의를 통해 공직자 1개월 급여의 20%를 기부받고, 잔액은 극빈자를 제외하고 각 면 호세 등급별로 배당하고 각 면별로 면민대회를 열어 사업취지를 설명하고 모금을 결의토록 했다. 아울러 개별적인 독지가의 기부도 받았다. 면별 할당액은 다른 면은 8백원~2천4백원 수준이며, 속초항이 위치한 도천면은 전체 양양군 부담액 3만원의 58%가 넘는 1만7천5백원을 할당했다. 당시 매일신보에는 각 면민대회에서 참석자들이 만장일치로 할당액을 동의했다고 하지만, 1년 전 최악의 해난사고와 수해를 입은 주민들로서는 엄청난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속초항 수축공사는 1932년 11월 기공식을 갖고 1933년에는 시국응급시설사업으로 1차 공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1934년부터는 제2차 궁민구제토목사업으로 사업비를 조달해 진행되었다.
1930년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국내경기가 극도로 위축되어 실업자가 늘어나고 농촌은 쌀값 폭락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되자 고육책으로 내놓은 게 궁민구제토목사업이다. 1931년 새해벽두 조선총독부에서는 대대적인 경기부양책으로 3년간 6,500만원을 들여 궁민구제토목사업으로 도로공사, 치수사업, 사방공사, 항만건설 등을 시행하기로 했으며, 전국에서 11개 항만도 궁민구제사업으로 진행했다.
궁민구제토목사업은 국고보조, 도지방비 보조로 조달하였고 부족한 금액은 도지방비나 조선식산은행, 일본 대장성 예금부를 통해 차입하였다. 천문학적인 사업비로 진행된 이 사업으로 시멘트 가격을 담합한 일본 대재벌들과 청부업자와 하청업자들에게만 큰 혜택이 돌아가고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는 쥐꼬리만한 혜택이 돌아갔다는 비판을 받았다.
1932년 11월 6일 오후 3시 속초항만 기공식이 축항 현장 부근 모래사장에서 강원도지사와 관계공무원, 도평의원, 기성회장 등 인사들이 모인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다. 1929년 기성회 활동이 시작된 지 3년만에 결실을 맺게 되었다. 이날 기공식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악천후 속에 거행되었고, 식후에는 처음으로 들어서는 속초시장 개막 축하행사도 열렸다.
한편, 1932년 11월 25일 부산일보에서는 속초항 개발로 큰 타격을 우려한 대포항 일본인과 한국인 일부 인사들이 동해안 철도측량대로부터 향후 들어설 철도역이 속초리로 내정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철도국에 대포리에 철도역을 설치해달라는 진정서를 갖고 서울로 갔다고 보도했다.
엄경선 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1929년 발족한 속초리 축항기성회에서 만든 속초항 개발 홍보 사진엽서. 개발 전 속초항의 아름다운 풍경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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