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교육문화관 건물 정면출입구. 왼쪽 벽에 갈색 책장 하나가 다소곳이 놓여있다. 세월이 물 흐르듯 흘러버린 걸 어느 날 문득 깨달은 안타까운 중년 여인처럼 움츠린 채, 벽에 얌전히 붙어있는 나이든 책장. 축축이 젖은 손을 가진 어머니를 보는 듯 안쓰럽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그러하듯 그 책장은 사실 아주 중요한 일을 맡아 다부지게 해내고 있었다. 책 나눔터. 이것이 책장의 머리 위 커다란 명함 같이 붙어있는 현수막에서 밝힌, 그 소박한 책장의 빛나는 이름이다. 다 읽은 책을 가져와 그 품에 안겨 놓으면 책장은 필요한 사람들이 가져갈 동안 가슴에 알처럼 소중히 책을 품고 있는 것이다.
속초시립도서관과 작은 도서관들도 책을 기증받고 있지만 2010년도 이후 발행분만 받아들인다. 책이 낡고 오래되었다고 해서 그 속의 가치까지 폄하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디나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과 오래 된 책과의 반가운 만남을 주선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곳 속초교육문화관의 책 나눔터 책장이 하는 일이다.
이 책장에는 아무런 절차가 필요 없다. 그냥 누군가 집에 있는 책을 쓱 가져다 놓고 또 누군가 필요한 책을 그냥 쓱 가져가면 되는 그런 자연스러움이 있다. 이걸 조금만 더 미리 알았더라면 그동안 이사할 때마다 내다 버린, 적지 않은 책들에 대한 자괴감을 좀 덜 수 있지 않았을까. 책 한 권을 만들려면 또 그만큼의 나무를 베어내야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동안 그저 저울로 달아서 가격을 매기는 폐품취급을 당하게 만들었다. 그런 오래된 미안함이 이 책장을 이리도 반갑게 보게 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소소한 마음을 헤아려서 이렇게 책 나눔터를 설치해준 속초교육문화관에 감사드린다.
책장과의 첫 만남에서는 꽤 많은 책을 보았는데 두 번째 만남이었던 지난 4월 22일에는 그 많던 책들이 거의 다 시집가 버린 상태였다. 그래도 무려 두 권의 책을 골라 품에 안았다. 무척 흐뭇했다. 앞으로 모든 도서관과 공공기관에 이런 무인 책 나눔터를 개설하는 건 어떨까. 더 나아가 장난감과 옷, 안 쓰는 전자기기나 그림, 각종 살림도구나 기념품들을 위한 무인 나눔터도 설치한다면, 삼척시에서 성공했다는 벼룩시장과는 또 다른 즐거움을 속초시에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갯배문화제가 열렸던 금강대교 아래 공간 같은 곳에 상설 나눔터를 설치한다면 추억에 젖은 관광객의 발길을 유도하는 코스도 될 수 있을 것 같고…. 그러면 속초시민으로서 무척 신이 날 것 같다. 오래된 책장 하나로 아이디어가 마구 생성된다. 생각의 넓은 동심원에서 빠져나와 다시 보니 더욱 반가운 나눔터책장이다. 안 보는 책을 어디 뒀던가 생각해보는 마음 때문에 더욱 즐겁다.
위나정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속초교육문화관 정면 출입구에 설치된 ‘책 나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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