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조선희의 초기작품 중 속초해변에서 찍은 사진이 있다. 흰 포말을 일으키는 속초해변을 배경으로 가슴부터 무릎정도만 나온 소녀의 옆모습이었다. 색을 거세하고 얼굴을 가린 무표정한 사진은 낯설고 두려운 순간을 웅변하는 듯 보였다. 작가는 남은 자의 그리움을 표현했다고 한다.
한국계 프랑스 작가 엘리자 수아 뒤사팽의 소설 <속초에서의 겨울>(북레시피) 한 대목을 읽고 난 뒤 조선희의 사진이 생각났다.
“겨울과 물고기를 내보이며 속초는 기다리고 있었다. 속초는 오로지 기다리기만 했다. 관광객들, 배들, 남자들, 그리고 봄의 귀환을. 엄마에게 남은 건 오한밖에 없었다.”(97쪽)
남은 자의 그리움과 경계의 탈주
소설의 주무대는 속초이다. 한국인 어머니와 프랑스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의 여주인공이 일하는 펜션에 프랑스인 만화가가 투숙한다. 그녀는 이제 막 엄마의 그늘에서 독립했다. 모델이 되고 싶은 애인은 그녀와 함께 속초를 떠나려고 하지만 내키지 않는다. 그때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속초까지 영감을 찾으러 온 만화가 얀케랑과의 만남은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저자 엘리자 수아 뒤사팽은 아버지의 나라 프랑스와 어머니의 나라 한국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탐색하기 위해 글쓰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전쟁의 상흔을 갖고 있는 해변도시 속초와 노르망디, 떠나지 못하는 펜션의 주인공과 떠날 수밖에 없는 얀 케랑이 등장하는 이유이다.
작품은 섬세하고 치밀하다. 음식의 욕망과 성형수술, 만화 엿보기 등의 이미지가 조금씩 실타래를 풀면서 작가의 내밀한 자의식을 드러낸다.
작가는 속초의 대표음식으로 문어볶음과 오징어순대, 복어 사시미를 표현한다. 음식은 속초의 상징이자 엄마의 정체성이다. 주인공은 얀 케랑에게 음식을 먹이려고 하지만 자꾸 실패한다. 정체성의 스밈과 얽힘이 실패하는 순간이다.
케랑의 만화에 대한 묘사는 글쓰기의 자의식과 소설의 의미에 대한 고백에 다름 아니다.
“사실, 주인공이라는 용어 자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했다. 그의 주인공은 모든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찾는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106쪽)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본 나는 내가 잉크 대신 두 선 사이의 흰 공간, 종이에 흡수된 빛의 공간만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의 진짜 같은 눈이 환한 빛을 발했다. 마치 표의문자처럼. 나는 다른 그림들도 훑어보았다. 칸들이 휘어지고 흐려져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등장인물이 그 칸들 바깥에서 자신의 길을 찾고 있는 것처럼. 시간이 확장되는 것처럼.”(105쪽)
케랑의 만화가 처음에는 흑백의 이미지였지만 펜션에 두고 간 화첩에서는 마치 인상파의 붓질을 연상시키는 화려한 묘사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작가의 치밀한 구성이 돋보인다. 작품은 전체적으로 이미지의 서사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시각이미지의 묘사가 강하다. 주인공의 훔쳐보기와 내밀한 욕망의 표현에서도 시각이미지는 빛을 발한다.
성형에 관한 설정도 흥미롭다. 대한민국이 성형공화국이라고 소문나서일까. 얼굴성형 수술을 한 펜션 투숙객과 성형을 권하는 이모의 이야기는 혼혈로 곤란을 겪었을 주인공과 겹친다.
치밀한 구성 돋보이는 이미지 서사
예술가의 색다른 시선은 속초를 더욱 깊고 넓게 만든다. <속초에서의 겨울>이 그렇다. 혼혈 여인의 기다림과 내면의 방황을 통해 드러나는 속초의 모습은 화려한 관광지의 이미지를 확장시켜준다. 휴전선이 가까운 항구도시, 회색빛 우울 속에서도 경계 밖을 질주하고자 하는 생(生)의 욕망이 꼼꼼한 취재와 만나 수준 높은 작품으로 탄생했다.
올해 속초는 유난히 별스러웠다. 동서고속화철도 확정으로 도시희망의 새로운 역사를 열더니, 포켓몬GO라는 게임으로 젊은층의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겨울 초입에 뜻하지 않은 선물 <속초에서의 겨울>을 만났다. 국제적인 화제성도 높다. 불어나 독어로 쓴 첫 작품에 한해 2년마다 선정되는 스위스의 문학상 ‘로베르트 발저 상’을 수상하였으며 프랑스에서는 ‘문필가협회 신인상’을 수상했다.
속초시와 속초축제위원회가 저자 엘리자 수아 뒤사팽을 초청하여 북콘서트를 개최한다. 이상국 시인이 질문자라고 한다. 지역의 삶을 생의 언어로 표현하는데 탁월한 시인이 이국의 젊은 작가에게 어떤 질문을 건넬지 궁금하다. 북콘서트는 설악문화센터에서 12월 27일 오후 6시 30분부터 시작한다. 불꽃 튀는 대화, 축제같은 저녁이 될 듯하다. 매달 유명작가 초청 팸투어와 북콘서트가 개최된다면 그 어떤 관광마케팅보다 효과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덧붙여본다.
김인섭 속초문화원 사무국장
‘속초에서의 겨울’작가 엘리자 수아 뒤사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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