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이어가며
먼저 글쓴이의 그 주인공을 찾고자 한다면, 우암이 추측한 “정희량설”과 권구의 “조광조설“로 좁힐 수 있다. 다만, 좀 더 폭넓게 생각해 본다면 우암과 조광조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이곳에 와서 이 글을 보게 되더라도 이 글의 교훈에 들어맞는 인생을 가졌다면 같은 처지가 되었다면 그 누구도 이 글의 주인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다음 물치주시의 작성연대에 대해 1674년이라는 집주인의 증언을 절대적인 증거로 한다면, “정희량설(1469~?)”과 “조광조설1(482~1519)’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두 사람 모두 1674년 이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정희량이 설마 도인(道人)이라 할 지 라도 200세 이상 살 수 있을까?
권구의 글에 나오는 조신운의 아버지인 조직이 양양에 있을 때 유배당한 죄인들의 하소연과 귀양살이 당시의 일을 적은 것으로 보이는 상소를 올렸으니, 조직이 양양에 있을 때가 1637년 7월부터 1643년까지이고, 갑인년 전에 어떤 사람이 글을 남겼다고 하였으니 물치주시는 적어도 1614년(갑인년) 이전에 쓰여진 글이 된다. 1674년에 썼다는 집주인의 말은 물치주시 일화를 미화하는 과정에서 현실감을 나타내기 위해 와전되었을 확률이 높다.
■글을 마치면서
우암은 함경도 덕원에서 경상도 장기로 이배 도중 영랑호에 들러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인근바위에 ‘영랑호’라는 글을 쓴다.
영랑호(永朗湖)!.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영랑호(永朗湖)의 한자는 ‘밝은 랑(朗)’이 아닌 ‘사내랑(郞)’을 쓰는 영랑호(永郞湖)이다. 우암의 제자인 유풍악기《游楓嶽記》의 저자 김유(金楺)도 이 상황을 그의 글에서 지적하고 있으며, ‘어찌 이런 뜻이 있겠는가(豈有其意歟)?’ 하며 한탄하고 있다.
우암이 유배길에 이르면서 흔적(자신의 심정)을 남긴 것을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덕원의 철령에서 ‘머리 돌려 서방을 바라보니 검은 구름 가리어져 걷히지 않네. 서방 사람에게 말하노니 붉은 노을에 밝은 달빛 차소서.’라며 아직 자신에게 희망, 빛이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동해의 해암정에서도 ‘풀은 구름과 어우르고 좁은 길은 비스듬히 돌아든다’(의역 : 구름이 풀을 안고 깊고도 좁은 길을 구불구불 돌아든다)’라며 험난한 역경을 이겨나가려고 희망찬(밝은) 모습을 의미하고 있다. 1680년 전남 보길도에서도 ‘초구(임금이 하사한 담비 갖옷)에는 옛 은혜 서려있어 감격한 외로운 속마음 눈물 지우네.’라며 비록 자신은 억울함에 당해 유배당했지만, 아직 임금에 대한 사랑(빛)은 남겨놓았다.
즉, 유배 길에 깃든 우암의 마음은 비록 자신의 현재 신세는 보잘것없이 변해버렸지만, 내일(성군)에 대한 희망(다시 불러줌, 빛)이 가득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우암이 지은 시문에서 빛(희망)을 광(光), 화(火), 명(明) 등으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우암은 영랑호 ‘랑(郞)’의 음을 빌어 ‘밝을 랑(朗)’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김유의 표현은 반어적(反語的)인 표현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듯 싶다. 즉 영랑호(永朗湖)을 ‘영원히 밝은 호수’로 자신에게 불어닥친 핍박(무고)이 억울하지만, 그래도 왕에 대한 자신의 희망을 나타내려는 의도로 해석함이 바로 실수(失手)가 아닌 그 뜻(意)! 우암의 심경인 것이다.
물치주시의 글쓴이로는 ‘정희량설’이 가장 유력하고, 조광조와 송시열을 조롱하는 글이라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조광조는 글쓴이의 후보자이자 교훈의 대상이기도 한다. 정희량과 조광조의 공통점은 모두 사화(史禍)의 피해자라는 것이다.
사실 본 글의 목적이 속초와 송시열과 연관된 사연을 쓰고자함이므로, 물치시주 또한 송시열과 연관시켜 끝을 맺는 것이 좋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그러나, 물치주시가 주는 교훈이 너무 크기에, 송시열만이 교훈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기에 조광조를 같이 넣고자 하려는 것이다.
‘역사는 이긴 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중 선조실록은 원본(元本)과 수정본(修政本)이 있다. 후대의 정치인들의 주도세력에 의해 다시 쓰여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송시열 또한 그 인생의 말로는 비참하였으나, 1716년의 병신처분[(丙申處分), 윤증의 부친인 윤선거(尹宣擧)가 사망하자, 우암에게 묘갈명을 부탁하여 받았는데, 이에 대해 윤증이 불만을 표시하면서 시작된 논쟁에 대해 국왕이 윤증의 잘못으로 판정한 정치적 처분]과 1744년(영조 20)의 문묘배향으로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을 회복하였다. 영조 및 정조대에 노론 일당전제가 이루어지면서 송시열의 역사적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받게 된 것이다.
또한, 유배기간 중이라 하더라도 그래도 그를 따르고 섬기는 자들이 많았으니, 영랑호에 우암의 글씨가 있다는 기록을 남긴 김유나 이해조 뿐만 아니라, 우리 지역의 유명한 처사(處士)인 물재(勿齋) 유회일(柳晦一)이 그 중 한사람이다.
물재 유허비(勿齋 遺墟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갑인년(1674년)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역적(逆賊) 윤휴(尹鐫) 곁에서 머뭇거리면서 선비의 이름을 빌려 사화(士禍)에서 광대노릇을 하였다. 그 무리들이 성균관(成均館)을 혼란케 하려고 하니, 공은 뜻을 함께한 동지(同志)들과 통문(通文)을 돌려 그들의 죄를 성토(聲討)하고 심지어 윤휴의 이름을 사적(士籍)에서 지워버리고자 하였다.
이때부터[1674년~기사년(1689년)] 공은 벼슬길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이 마을에 은거하였다. 이곳은 바로 양양(襄陽)에서 다스렸던 곳으로, 이 마을의 이름은 물치(勿緇)이고 우암(尤菴) 송 선생(宋先生)이 귀양 가던 길에 머무셨던 곳이다. 공은 그 자리에 거처하며 흠모하였으니, 높은 산과 큰길처럼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를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 집에 ‘물재(勿齋)’라고 편액(扁額)하였는데, 이는 더러워지지 않는다는 물치(勿緇)의 마을 이름에서 의미를 취한 것이었다.’
호를 짓는 기준에 대해 이규보(李奎報)는 그의 ≪백운거사어록(白雲居士語錄)≫에서 “거처하는 바를 따라서 호로 한 사람도 있고, 그가 간직한 것을 근거로 하거나, 혹은 얻은 바의 실상을 호로 한 사람들도 있었다.” 고 하였다.
정희량의 호는 허암(虛菴), 조광조의 호는 정암(靜庵), 송시열의 호는 우암(尤庵)이다.
세사람 각각 욕심없는 바위(허암 : 인천 계양산의 허암봉에 유래), 고요한 바위[논어에 이르기를 어진사람은 고요하다(靜) 한다], 뛰어난 바위, 동떨어진 바위! 그들 모두 외로이 서있는 바위나 암자로 비유하면서 겸허하게 조용하게 세상을 바꾸고자했으나, 실상은 그러하지 못했고, 세상의 적들은 기득권 유지를 위해 그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우암의 ‘영랑호(永朗湖)’라는 글씨의 발견이 언론에 보도되고 난 후, 지난 9월말 문화재청에서 여러 전문가들이 진위여부를 확인하려 현장에 와서 조사를 실시하였다. ‘영랑호(永朗湖)’라는 각자와 그 글자가 우암의 것이라는 김유의 유풍악기《游楓嶽記》의 기록고증을 통해 우암의 필체라는 것은 확실히 밝혀졌다.
그러나, 고성 가학정(高城 駕鶴亭), 해산정(海山亭), 간성 선유담(仙遊潭), 강릉 해운정(海雲亭)의 「정부자영당기(程夫子影堂記)」, 경포호의 조암(鳥巖), 동해의 해암정(海巖亭), 전남 보길도 등 전국에 우암의 글씨가 많이 산재해 있어서 문화재 등록으로써의 가치는 희박하다.
다만 철령, 양양, 동해 울진, 장기 등 우암의 귀양길만을 종합하여 하나의 스토리텔링 소재로 자리잡아 영원히 후세에 전해지길 바라며, 물치주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바로 새겨 우리의 삶에 지표가 되기를 바란다. <끝>
우암의 영랑호(永朗湖) 글씨가 새겨진 바위. ‘영(永)’자와 ‘랑(郞)자 왼쪽으로 우암(尤庵)이라는 글씨가 희미하게 보인다.
전남 보길도의 우암의 ‘글쓴바위’.
정상철
속초문화원 부설 속초시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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