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인들과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화제가 나의 신상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갔다. 교육장 임기가 끝나면 어느 학교로 갈 예정이냐? 퇴임하면 무얼 할 작정이냐? 등 등. 평생 배우고 한 일이 아이들 교육이니 아이들 교육에 관한 봉사 활동도 하고, 시를 쓰는 시인이니 인문학포럼을 만들어 지역 문화예술의 저변 확대도 해보고 싶고, 20 여 년을 독서교육에 대한 공부를 했으니 어린이 전용 도서관도 하나 만들고 싶고, 할 일이 많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평생을 교육자로 사셨으니, 퇴임하시면 이지역의 큰 어른 역할을 하는 훈장님이 되어 보시는 건 어떨까요?’ 라는 뜬금없는 질문이 돌아왔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을 이어갔다. 지금 나라가 이렇게 어수선한 이유가 나라에 제대로 된 큰 어른이 없어서 그렇단다.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살기 어려운 옛날에도 올바르지 못한 일에는 목숨을 걸고 임금님께 바른 소리를 하다 귀양도 가고, 때론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신념과 지조를 버리지 않는 ‘선비’라는 이름의 큰 어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경제라는 가치가 최우선이 되면서 오히려 바른 말, 쓴 소리를 하는 큰 어른이 없어 나라가 이지경이라는 논리였다. 그러면서 옛날에는 마을에서 그런 역할을 하시던 분이 훈장님이셨는데, 지금은 그런 훈장님 역할을 하는 지역의 어른들이 없어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옛날 훈장님은 주로 그 동네에서 글 좀 꽤나 배운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서 운영하거나, 마을사람들이 교육의 필요성을 느껴 그 마을에서 학식이 높은 사람을 훈장님으로 초청해서 서당을 운영했다. 훈장님은 단순히 아이들의 교육만을 맡은 것이 아니라, 그 마을, 또는 고을의 지식인으로 학부모나 수령들에게 존경과 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거기에다가 문맹이 많았던 시대인지라 편지가 오면 받아 읽어주고, 보낼 편지를 대신 적어서 보내주거나 제사 때 쓰는 지방이나 축문 등을 대신 써주는 일을 겸하기도 했다. 또한 마을의 사소한 시비거리를 판결하거나, 어려운 문제를 상담해주는 큰 어른의 역할을 맡기도 했다.
모임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문득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이 떠올랐다. 나에게 아버지는 늘 두 개의 얼굴로 존재했다. 하나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 법을 공부한 이력이 있어, 일본어가 유창하고 법에 관한 지식이 많아 면사무소나 군청에 일본어 통역이 필요하거나, 법에 관한 자문이 필요한 일에는 늘 아버님이 불려 가셔서 해결을 해 주시곤 했다. 또한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법률사무소나 등기소 같은 곳이 없어, 마을 사람들의 다툼으로 인한 송사나, 토지 거래 등기, 심지어는 아이들 이름 작명까지 모두 아버지의 손에서 해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아버지의 해결방안은 늘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졌다. 나중에 아버지께 그 비결을 물었더니 ‘사무사(思無邪)’라고 한 마디를 툭 던지셨다. 그 어려운 일을 해결하는 대가는 늘 소주 한 병이었다. 또 다른 아버지의 얼굴은 주사(酒邪)였다. 술을 드시지 않았을 때는 과묵하다는 표현이 딱 맞는, 말이 없으신 분이셨다. 그런데 술 한 잔이 들어가셔서 취기가 드는 순간부터 평소 마음속에 품었던 생각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술 취한 아버지의 거침없는 쓴 소리의 대상은 주로 지역의 기관장이거나 유지로 불리는 사람들이였다. 군수님도, 면장님도, 지서장님도 모두 예외가 없었다. 듣는 이들은 고역이었으나, 옆에서 구경하는 이들에게는 요즘 표현으로 ‘사이다’ 같은 쓴 소리들이였다. 그런데 나는 아버지의 그 모습이 참 싫었다. 술에 취해서 하는 쓴 소리는 올바른 소리가 아니라 주사로 취급받기 때문이었다. 더욱 싫었던 것은 집에 돌아오신 아버지 앞에 장남이라는 이유로 한 두 시간씩 무릎 꿇고 앉아서 세상에 대한 온갖 쓴 소리를 내가 들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지역의 큰 어른 역할을 할 사람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지인의 말과 겹쳐서 ‘우리 지역의 큰 어른은 누구일까?’ 라는 궁금증과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이 자꾸 어두워져 가는 거리의 어둠 속에 오버랩 되는 초겨울 저녁이다.
김종헌
시인·속초양양교육장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