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장열 / 언론학자
몇 해 전, 한국과 독일의 시의회 의원들이 교류하는 자리에 동행한 적이 있다. 방문한 도시는 친환경 정책으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대표적 ‘선진 사례’ 도시였다. 도시 정책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던 중, 한 한국 방문자가 이렇게 질문했다. “독일은 시장이나 대통령이 바뀌면 기존 정책도 함께 바뀌지 않습니까? 우리는 대표가 바뀌면 정책은 물론 실무 책임자까지 교체되어 정책의 지속이 어렵습니다.” 질문을 받은 독일 의원은 한참 생각한 끝에 되물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죠?”
정책은 정권의 것이 아니라 공공의 것이다. 따라서 정책이 실현되기 위해선 정당성이 필요하며, 이는 공론화 과정과 대중의 동의, 전문가와 실무자의 검토를 통해 형성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대통령 선거를 기점으로 많은 정책이 정당성이 아닌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등장하고 사라진다. 선거 때 제시된 공약은 정권이 교체되자마자 대중이 아니라 대통령의 ‘입’을 바라보게 된다.
대선이 끝난 직후, 각 지역과 산업계는 새로운 대통령의 공약을 실현하기 위해 분주하다. 언론과 사법 시스템은 개혁 대상으로 지목됐고, 공영방송은 ‘공적 역할 강화’를 명분으로 방송3법 개정을 앞두고 있다. 미디어 산업은 ‘경쟁력 강화’를 위한 진흥 대상이 되었고, 지역 언론은 재정난 해소를 위한 구조적 개편과 안정적 지원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두는 정부의 ‘입김’을 바라보며 움직이는 상황이다. 미디어 정책조차 자율적 검토보다는 정치권의 눈치를 보는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람이 중심이 되는 사회는 이상적인 가치로 여겨지지만, 정책의 결정에서 ‘개인’ 중심이 되는 것은 위험하다. 정당성은 사적 판단이 아닌 공공 절차로부터 비롯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대통령실 브리핑룸에 카메라 4대를 추가 설치하겠다는 발표가 있었다. “대통령과 언론의 소통 현장을 보다 생생히 전달하겠다”는 취지였지만, 정작 언론계에서는 기자 얼굴을 공개하는 방식에 대해 초상권 침해를 우려하며 반발했다. 정책의 정당성과 절차적 타당성이 부족했던 탓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정책이 대통령이 SNS 댓글을 보고 “의미 있다고 생각해 실행에 옮겼다”는 발언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인터넷 공간에는 창의적이고 유익한 제안이 넘쳐난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라도 정책으로 이행되려면 관계 부처의 검토, 전문가 자문, 공론화 과정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정책은 임의적 판단이 아니라 제도적 신뢰에 의해 작동해야 한다.
이미 인터넷 언론이 등장한 지 30년, 유튜브와 페이스북이 상용화된 지 20년이 지났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해외 플랫폼 기업을 규제할 법적 체계조차 갖추지 못했다. 유튜브는 방송법의 적용 대상이 아니며, 통합미디어법은 2009년부터 논의됐지만 여전히 부처 간 이해관계와 국회의 정쟁 속에 입법되지 못하고 있다. 공영방송 수신료는 1981년 인상된 이후 지금까지 2,500원에 머물러 있다.
정책은 연속성과 일관성을 바탕으로 신뢰를 얻는다. 하지만 바뀐 사람이 정책을 바꾸는 구조에서는 기존 정책의 연장이나 보완조차 어렵고, 대중이 새롭게 요구하는 정책은 권력자의 입맛에 따라 좌우된다. 결국 우리는 또다시 ‘누가 되었는가’에 주목하며, 정책의 본질보다 권력자의 의중을 헤아리는 사회에 머물고 있다.
모두가 권력자의 입만 바라보는 이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정책의 공공성과 정당성, 제도적 절차를 다시금 되새겨야 한다. 선거는 정책의 방향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그 구체적 실행과 검토는 전문가와 시민사회, 행정조직의 몫이다. 민주주의는 입으로 선언되는 것이 아니라, 공론과 절차 속에서 구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정책은 사람의 뜻이 아니라 공론의 절차로 완성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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