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속초문화도시 현장간담회 참석자들이 퍼포먼스 다이닝 ‘동쪽의 밥상’ 프로그램과 속초지역 음식들을 체험하고 있다. 퍼포먼스 다이닝은 실향민 음식과 지역 식재료를 활용한 음식 콘텐츠로, 속초의 음식문화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풀어낸 시도다.
지난해 말, 속초시는 강원특별자치도에서 유일하게 대한민국 법정 문화도시로 최종 지정됐다. ‘맛으로 엮어가는 도시의 멋(Culinary City SOKCHO)’이라는 비전 아래, 음식문화를 매개로 도시 정체성과 시민의 삶을 연결하는 것이다.
속초시의 문화도시 사업은 단지 ‘맛있는 도시’를 만들자는 데서 출발하지 않는다. 오징어순대, 명태회무침, 가자미식해 등 속초시민의 삶에 녹아들어 있는 향토 음식을 단순한 먹거리가 아닌, 실향민의 아픔과 속초 고유의 삶과 역사를 담고 있는 음식문화로 재발견하고 또 다른 문화콘텐츠로 재생산할 수 있도록 가능성을 짚어보자는 것이다. 여기에 관광도시로서의 경험과 인프라를 더해, ‘음식’이라는 생활문화를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문화콘텐츠로 확장하려는 전략이다.
문화도시란 무엇인가
문화도시는 지역 고유의 문화자원을 바탕으로 주민이 직접 문화적 가치를 창출하고 향유하는 도시를 말한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18년부터 문화도시 정책을 통해 지역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중심으로 지속 가능한 도시발전 모델을 만들어가고 있다. 단순한 축제 중심이 아닌, 일상 속 문화와 시민 참여를 핵심으로 하는 것이 특징이다.
문체부는 2023년 12월 세종시 등 13곳의 ‘대한민국 문화도시’ 조성계획을 승인했고, 해당 지자체는 2억원의 사업비를 지원받아 예비사업을 추진했다. 이후 문체부는 2024년 12월 조성계획에 대한 현장·발표 평가를 거쳐 13곳 모두를 ‘대한민국 문화도시’로 최종 지정했다.
속초가 문화도시사업에 선정되기까지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2019년 문화특화지역 조성사업을 시작으로 문화도시 공모에 도전한 속초시는 2021년 제4차 예비문화도시 선정에서 고배를 마신 뒤, 2022년 ‘공존문화도시 속초, 시민의 문화적 삶이 생동한다’를 비전으로 제5차 예비문화도시에 재도전해 선정됐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대한민국 문화도시 조성사업’으로 재신청을 받았고 속초시는 ‘음식문화’라는 키워드로 사업계획을 수립해 문화도시로 지정됐다. 올해부터 2027년까지 3년간 국비 99억원과 자체예산을 포함한 총 198억원을 투입해 음식문화를 중심으로 한 글로벌 문화도시 조성사업을 추진한다.
왜 ‘맛’인가…실향민 정체성 담긴 식문화
속초는 한국전쟁 이후 실향민들이 터를 잡고 정착한 지역이다. 그들이 가져온 함경도 음식문화는 시간이 흐르면서 속초만의 색깔을 입었다. 오징어순대, 명태회무침, 가자미식해, 홍게장 등은 이곳 사람들의 삶과 계절을 함께 반영하는 음식들이다. 또한 동해에서 나는 해산물과 설악산 자락에서 얻는 산채류까지 더해져 풍성한 지역 식재료 기반을 갖추고 있다.
속초시의 문화도시 조성계획을 총괄한 권순석 ‘바라’ 대표는 “좋은 음식문화는 재료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며 “자연에서 얻은 재료에 더해 그것을 다루는 사람들의 삶의 기술, 그리고 우리만의 라이프스타일이 함께 어우러질 때 비로소 음식이 문화가 된다”고 강조했다.
관광산업의 중심지로서 다양한 음식 소비층을 받아들이며, 전통 향토음식과 현대적 감각이 어우러진 식문화가 속초에는 자연스럽게 공존하고 있다. 이런 속초의 음식은 관광객에게는 이색적인 경험이자, 지역민에게는 정체성과 자부심이 된다. 속초시는 이 같은 음식의 다층적 가치를 문화도시의 비전으로 설정했다. “맛은 결국 삶이며, 속초의 삶을 가장 잘 드러내는 매개가 바로 음식”이라는 인식이 그 바탕에 깔려있다.
지난해 가을, 청호해변에서 ‘2024 속초국제음식영화제’가 열렸다.
‘맛’에서 ‘멋’으로…속초형 융합문화 실험
문화도시 속초는 ‘맛’에 머무르지 않는다. 음식과 예술, 음식과 공연, 음식과 스토리텔링이 결합된 새로운 실험을 통해 도시문화의 층위를 넓히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동쪽의 밥상’이다. 실향민 음식과 그에 얽힌 지역주민들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퍼포먼스 다이닝 콘텐츠로 개발한 이 프로젝트는 지역 셰프와 예술가, 기획자가 함께 참여한 융합문화의 실험이다.
지난해 속초 청호해변에서는 그동안 서울에서 개최해온 국제음식영화제가 열렸다. 이 영화제는 ‘맛’을 시각예술로 전환하고, 음식에 담긴 이야기를 관객과 공유하는 창구가 되었다. 속초연극협회는 실향민 음식에 얽힌 에피소드를 공연으로 풀어내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이는 지역민과 관광객에게 색다른 문화적 체험을 제공했다. 음식을 단순한 먹거리에서 ‘문화적 경험’으로 전환하는 이 같은 시도는, 문화도시 속초의 방향성을 명확히 보여주는 예다. 맛에서 시작해 멋으로, 즉 오감을 자극하는 예술적 문화도시로 확장해 나가겠다는 것이다.
고성·양양과 영북권 광역문화 실험
속초는 이번 문화도시 사업을 단독 사업이 아닌, ‘영북권 상생문화도시’로 확장해 추진하고 있다. 고성·양양과 함께 ‘북위 38도 문화권’이라는 상징적 프레임을 설정하고, 음식문화는 물론 예술, 관광, 지역 브랜드까지 아우르는 광역형 협력 모델을 구축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SynerGY(시너지) 위크’가 있다. 이 행사는 속초·고성·양양의 로컬브랜드가 함께 참여한 팝업 마켓, 전시, 콘퍼런스 등을 통해 지역 간 문화교류와 경제적 시너지를 창출하는 데 성공했다. 지역 소상공인과 청년 창작자, 예술인들이 주도한 이 프로그램은 상향식 문화도시 모델로서 주목을 받았다.
또한 향후 3년간 속초시는 ‘컬리너리 속초 앵커사업’의 일환으로 △컬리너리타운 조성 △컬리너리 아카데미 설립 △레시피·스토리북 개발 △영북지역 식문화 조사 및 상품 개발 등을 계획하고 있다. 고성과 양양도 일부 군비를 투입해 참여할 계획이다.
문화도시 현장간담회에서 권순석 속초문화도시 총괄기획자가 음식문화도시의 비전과 전략을 설명하고 있다.
국내외 음식문화도시와 교류 협력
문화도시로 지정된 속초시는 음식문화가 도시 정체성과 경제적 지속성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를 본격적으로 시험받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지역의 향토음식을 문화콘텐츠로 전환하고, 이를 기반으로 시민참여형 프로그램과 글로벌 문화관광전략을 병행하는 구조는 이제 막 실행에 들어갔다.
권순석 총괄기획자는 문체부 현장간담회 브리핑에서 “속초는 국내외 음식문화 도시와의 협력과 교류를 통해 글로벌 문화도시로 도약할 수 있는 토대를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전 세계 미식 지역 플랫폼인 IGCAT(국제 미식·문화·예술 및 관광 연구소)에 5월 31일 가입 예정이고, 2028년 세계미식문화 도시로 선정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며, “현재 IGCAT 내에 아시아권에서는 일본만 등재되어 있어, 속초가 대한민국 최초의 국제적 미식문화도시로 인정받는 계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최근 열린 문화도시 현장 간담회에서는 속초 시민과 전문가들이 다양한 의견을 공유했다. “관광객을 위한 도시가 아니라, 시민들이 문화를 누릴 수 있는 도시였으면 좋겠다”, “음식이라는 주제를 일상에서 체감할 수 있도록 시민의 역할과 공간이 충분히 설계되어야 한다”는 제언이 이어졌다.
전문가들 또한 “속초가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시도하기보다, 핵심 성장축에 대한 우선순위를 명확히 해야 한다”면서 “문화도시는 시설이 아닌 관계를 짓는 일”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며 시민참여 구조의 정교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속초는 음식이라는 일상적이면서도 강력한 문화자산을 중심에 둔 실험을 막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실험은 더 이상 지역 안에만 머물지 않고, IGCAT, UNWTO(유엔관광기구) 등 국제 문화 네트워크와의 연계를 통해 속초는 글로벌 문화도시로 나아가는 방향을 구체화하고 있다. 도시가 가진 자연환경, 역사, 삶의 방식,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가 음식이라는 매개를 통해 세계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 그 과정에서 시민은 어떤 주체로 참여하고 어떤 관계망이 형성될지 속초의 문화도시 실험은 이제 로컬과 글로벌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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