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속’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이유 대표. 밴드 베이시스트이자 문화기획자로 활동하며 속초 예술 생태계에 새로운 흐름을 만들고 있다.
속초 동해대로 한남빌딩 지하, 간판 없는 입구를 지나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작은 공연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지난 3월 새롭게 문을 연 소극장 ‘초속(CHOSOK)’은 공연장, 음악 창작소, 실험실, 커뮤니티 공간으로 이용되는 속초의 새로운 복합문화공간이다. 이유(39) 대표는 홍대에서 복합문화공간을 운영했던 경험을 살려, 이곳을 직접 기획하고 운영 중이다.
속초 왔지만, 음악할 공간 못 찾아
이 대표는 3년 전 바다와 영랑호에 이끌려 속초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베이스를 전공한 그는 밴드 활동을 계속해오던 음악인이었지만, 속초에서는 돈을 내고도 합주할 공간을 찾기 어려웠고 공연장을 대관하기란 더욱 힘들었다.
“서울에서는 돈만 내면 연습하고 녹음하고 공연까지 다 가능했는데, 속초는 전혀 아니었어요. 2시간 반 거리밖에 안 되는 곳인데 돈을 내고도 연습할 수 없는 현실이 충격이었죠.”
서울에서 문화 공간을 운영할 당시 소음 민원을 종종 받았던 그는 속초에서 제약 없이 창작할 수 있는 공간을 직접 만들고자 했다. 행정기관을 찾아다니며 유휴 공간을 제안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당시엔 여의치 않은 현실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이런 공연을 할 거야’라는 말을 주변 예술인들에게 수없이 반복하며, 문화 공간을 열겠다는 다짐을 실천으로 옮겨갔다.
개인연습실 문을 두드리다
마침내 발견한 곳은 예전부터 공연 무대로 쓰였던 작은 소극장이었다. 2019년 코로나 이후 폐업한 이곳은 건물주의 개인 연습실로 남아 있었고, 그 우연한 만남이 지금의 ‘초속’으로 이어졌다. 올해 3월까지 적당한 장소를 구하지 못하면 개인 작업실에서 곡 작업만 할 생각이었지만, 이 대표의 문화 공간 운영에 대한 계획을 듣고 건물주가 흔쾌히 승낙하면서 폐업 중이던 소극장을 빠르게 인수했다.
2월 말부터 공사를 마치고 3월 22일 ‘처음 뵙겠읍니다’라는 이름으로 오픈기념 공연을 올렸다. 속초예총 예술인들과 속초 지역밴드(MPM 밴드)가 무대에서 다채로운 장르를 넘나드는 무대를 펼쳤다. 50석 규모의 무료 초청 공연으로 진행되었고, 관람객들로부터 “공연 내용 너무 좋다”, “다양한 공연 많이 보여달라”는 호평이 이어졌다. 새로운 예술 공간의 가능성을 확인한 자리였다.
놀이는 결핍에서 시작된다
“어릴 적 놀이터에 모여 ‘오늘 뭐 하고 놀까?’ 하며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누군가 바닥에 선을 그으며 ‘여긴 입구야, 여긴 나가는 데야’라고 말하곤 했어요. 정해진 장난감 없이도 금세 놀이가 시작됐죠. 지금 생각해보면, 바로 그 결핍 속에서 창의적인 상상이 자랐던 것 같아요.”
이유 대표는 ‘초속’의 모토로 ‘단순함과 결핍이 만들어내는 창의성’을 내세운다. 어릴 적 놀이터에서 즉석으로 놀이를 만들던 기억처럼, 부족한 환경이 상상력의 출발점이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지원 사업 의존도를 줄이고, 지역 내부에서 자생적인 창작 기반을 마련하고자 노력한다.
우리 동네 사람들의 음악 놀이터
공연장을 연 직후에도 서울과는 확연히 다른 현실에 부딪혔다. 서울에서는 공간을 열면 바로 예약이 찼지만, 속초에서는 한 팀도 연락이 없었던 것이다. 이유 대표는 이에 굴하지 않고 새로운 방식을 택했다. 지역 주민들이 직접 무대에 서는 ‘우리 동네 DJ’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주민들이 DJ 장비를 빌리거나 교육 영상을 공유하며 장비를 체험하게 했고, 실제로 몇몇은 무대에 올라 공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흐름은 ‘우리 동네 밴드’로도 이어질 예정이다. 그는 속초 내 예술인들, 동호회, 청소년 등이 자유롭게 이 공간을 활용해 스스로 무대를 만들어 가길 바란다. 최근에는 설악중학교와 협업해 중학교 3학년을 위한 공연을 준비 중이다.
소극장 ‘초속’은 50석 규모의 객석에 드럼 세트와 마이크, 앰프, 조명 등 등 공연 장비를 갖추고 있다.
객석과 무대가 가까이 맞닿아 있는 ‘초속’의 구조는 예술가와 관객 사이의 경계를 허물며 공연에 몰입하게 한다.
문화예술도 소비하는 도시를 꿈꾸다
그는 지역에서 활동하는 문화예술인이자 복합문화공간 운영자로서 문화 소비 인식의 한계를 느끼면서, 시민들과의 접점을 찾는 데 있어서도 고민이 깊어진다고 말했다.
“많은 공연이 대부분 지원 사업에 의존해 무료로 제공되다 보니, 시민들도 자연스럽게 유료공연에 익숙하지 않게 된 것 같아요. 2만원만 받아도 ‘비싸다’는 반응이 나와요. 문화 콘텐츠는 충분히 그 값을 할 수 있다는 인식이 더 넓게 퍼졌으면 좋겠어요.”
그는 속초가 관광지이자 자영업 중심 구조를 갖는 지역이라는 점 역시 이런 문화소비 구조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았다. 주말에만 시간을 낼 수 있는 시민들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평일에는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할까와 같은 고민을 안고 있다.
함께 배우며 예술과 만나는 공간
이유 대표는 DJ 프로젝트로 시작된 작은 움직임이, 밴드 활동과 팀 간 협업 등으로 확장되길 바라고 있다. ‘우리 동네 시리즈’라는 이름 아래, DJ·밴드·워크숍 등 다양한 장르의 실험을 이어갈 계획이다. 음악 교육을 기반으로 한 프로그램뿐 아니라, 속초의 영랑호·아바이마을 등 지역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연극 기획도 염두에 두고 있다.
“제주도의 ‘해녀의 부엌’처럼, 지역의 서사를 예술로 풀어내는 공연이 이곳에서도 가능하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매주 또는 격주로 무대가 열리고, 관객이 일상처럼 문화를 만나는 구조를 만들고 싶어요.” 그는 ‘서툴러도 괜찮으니, 이 안에서 함께 자라고 무대에 서보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배워 무대를 만드는 흐름이 지역 안에 자리 잡기를 바라고 있다.
예술인의 ‘처음 속도’를 응원합니다
“제가 전라도 광주에서 19년, 서울에서 19년을 살고 나서 처음 제 의지로 삶의 터전을 택한 곳이 속초였거든요. 극장 이름도 단순히 기억하기 쉬운 이름이길 바라서 ‘속초’를 거꾸로 한 것도 있지만, ‘처음의 속도 그대로, 너무 앞서거나 뒤처지지 말고 균형 있게 가보자’라는 마음이에요.” 작지만 단단한 예술의 거점 ‘초속’은 지금도 시민과 예술인의 발걸음을 기다린다. 속초에서 예술의 지속 가능성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곳이 새로운 가능성을 키워나갈 작은 불씨가 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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