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한 그루를 곁에 둔다는 건 단순히 화분 하나를 들이는 일이 아니다. 식물을 돌보는 시간은 곧 나를 돌보는 시간이 된다. 초록의 생명은 세월의 흐름을 따라가기 바쁜 우리에게 쉼표를 건네고, 잠시 멈춰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조용히 잎을 내고 묵묵히 뿌리를 내리는 식물의 삶을 바라보며 우리는 스스로 치유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속초 밤골의 조용한 주택가 골목, 작은 식물작업실 ‘숙주나무’에서도 그런 특별한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 올해로 운영 5년 차에 접어든 ‘숙주나무’는 단순한 화원이 아니라, 식물과 사람이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는 공간’이다.
“봄에 식물의 성장 속도가 갑자기 빨라지면서 신엽을 내는 걸 보면, 그만큼 귀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생각해요. 겨울에 식물이 가라앉아 있다가도 자라는 게 하루하루 달라 보이면, 저도 함께 깨어나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자연스럽게 스며들 듯 식물과 함께 숨 쉬게 됐죠.”
나혜숙 ‘숙주나무’ 대표.
식물을 기다려주는 ‘작업실’
나혜숙 대표(39)는 서울에서 UX(사용자경험) 디자이너로 일하던 중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어서 하고 싶은 것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삶의 방향을 틀었다. 좋아하는 서핑을 하려고 매주 오가며 친근해진 속초는 그녀에게 새로운 정착지가 됐고, ‘숙주나무’를 오픈했다.
“숙주나무는 제 이름과 동업자 친구 이름에서 한자씩 따온 프로젝트명이예요. ‘맑을 숙’에 ‘뿌리 주’자를 쓰죠. 입에 착 붙기도 해서 대부분 안 잊어버리고 좋아해 주시더라고요.”
처음엔 커피를 마시며 식물을 만나는 공간이었지만, 식물에 집중하기로 했다. 식물이 잘 자라려면 그에 맞는 환경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농장에서 막 들어온 식물이 실내 공간에 적응하려면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게 나 대표의 설명이다. 숙주나무의 식물들은 병충해 확인부터 흙 교체, 가지 정리, 새 환경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손님에게 전달된다. 나 대표는 이 과정을 ‘작업’이라 부르며, 이곳을 가게가 아닌 ‘작업실’로 명명하고 있다.
“식물들이 하우스처럼 최적의 환경에서 살다가, 바로 가정집으로 가면 적응을 못 하고 시들해지거든요. 숙주나무는 중간 단계예요. 식물들에게 거점 같은 역할을 해요. 환경의 변화에 익숙해지도록 여기서 시간을 갖게 한 뒤에야 비로소 보내죠. 저 식물 꼭 갖고 싶다고 해도 제가 안 보내는 경우가 많아요.”
그녀는 식물을 단순한 상품이 아닌, 하나의 ‘생명’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어떤 식물은 오래 머물고, 어떤 식물은 ‘적응 완료’라는 진단을 받아야 고객에게 향한다. 나 대표는 아직도 자식 같은 식물을 손님에게 보내는 일이 제일 어렵다며 멋쩍게 웃었다.
‘숙주나무’ 내부. 이곳만의 개성 있는 식물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생명’이 만들어낸 다른 세계
나 대표의 이런 철학은 조경이나 공간 연출에서도 이어진다. 지난해 칠성조선소에서 열린 ‘BAC 속초아트페어’에서 그녀는 세 평이 채 안 되는 작은 온실을 연출해 관람객들의 호평을 받았다. 고성 ‘테일포터리’와의 협업은 큰 도움이 됐다.
“멋진 예술 작품들 옆에 작은 온실을 하나 만들었는데, ‘다른 세계에 온 것 같다’며 멍하니 바라보던 눈빛들이 기억나요. 관람객들이 좋아하는 반응을 보며 정말 행복했어요.”
나 대표는 올해 참여하는 ‘BAC 아트페어’에서도 식물 하나하나의 존재감이 돋보이도록 입체적으로 설치하는 연출을 고민하고 있다. 그녀의 정성 어린 손길이 닿은 식물들은 모두 개성이 강하지만, 식물과 삶, 시대에 대한 그녀의 독특한 시선도 특정 공간과 조화를 이루며 눈길을 끈다.
나혜숙 대표는 하우스에서 온 식물들이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도록 정성을 다한다.
식물과 사람이 함께 자라는 곳
나 대표가 지향하는 또 다른 가치는 ‘식물과 사람의 건강한 관계’다. 숙주나무에도 개업 화분 주문이 종종 들어오지만 거절하는 편이다. 개업 축하 선물로 식물을 보내는 건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방식이다. 큰 리본으로 화려하게 포장된 식물은 보내는 사람의 체면을 세워주고 받는 사람에게는 인맥의 증표가 된다.
나 대표는 개업 화분이 구석에 방치되거나 흙도 없이 스티로폼으로만 채워진 채 시들어버리는 모습을 자주 봤다며, 식물을 ‘과시의 도구’로 바라보는 것을 속상해했다.
“개업 화분은 스티로폼을 넣어 부피를 키우고 값싼 식물을 억지로 화려하게 꾸며 비싼 가격으로 둔갑시켜요. 선물하는 사람은 겉모습에 속고, 받는 사람은 감당할 수 없는 짐을 떠안게 되죠. 식물은 선물로 가서 더 예뻐져야 해요. 그런데 식물을 보여주려고 키우나요? 살아남고 자라야 의미가 있죠.”
그녀는 축하받는 사람에게 부담이 되지 않으려면, 식물이 잘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먼저 생각해보라고 권한다. 화분 주문이 들어오면 받는 사람의 취향과 공간의 특성을 고려한 맞춤 제안을 하고, 때로는 직접 방문해 설치한 뒤 사후 관리까지 책임진다. 번거롭지만, 생명인 식물들이 무의미하게 소비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노력이다.
“저는 가게 운영에 대해서는 여전히 초보라 생각해요. 하지만 숙주나무가 식물을 사기 위해 오는 공간이 아니라 조금 더 머물고, 배우고, 감각을 깨워주는 공간이 되길 원해요. 분갈이 클래스를 열거나 셀프 작업을 하는 공간, 숲과 같은 숙소도 구상하고 있어요. 식물을 사지 않아도 숙주나무에 들러서 힐링하고 식물을 예뻐해 주기만 해도 너무 좋겠어요.”
숙주나무에서 자라는 건 식물들만이 아니다. 생명에 대한 애정과 존중, 식물과 사람이 온전히 공존하는 방식을 고민하며 사람도 함께 자라난다. 식물들과 성장의 시간을 함께 나누는 곳, 숙주나무는 오늘도 조용히 초록의 시간을 채워가고 있다.
정채환 기자 gukyo1012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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