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범 대표가 직접 로스팅한 원두로 드립커피를 내리고 있다. 그는 커피에서도 ‘진심과 균형’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인생 1막: 사진, 삶을 기록하다
양양읍에서 속초로 향하는 길목. ‘조승범 커피 윈드블루’라는 간판 아래 자리한 작은 카페에 조승범(63) 대표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사진, 목공, 그리고 커피. 제 인생에서 바람은 늘 새로운 곳을 향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의 인생 1막은 사진이었다.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그는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자연스레 카메라를 손에 쥐게 되었고, 처음엔 가족 여행을 기록하면서 풍경을 담기 시작했다. 슬라이드 필름 속 사진을 들여다보며 알 수 없는 감정이 피어났다.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더 깊은 걸 담고 싶었어요. 내 마음을 찍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후배의 권유로 한 사진가의 수업에 참여하면서 그는 사진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6개월 동안 단 한 번도 지각하지 않을 정도로 열정을 쏟았고, 그 열정은 곧 첫 개인전이라는 결실로 이어졌다.
“그땐 어떤 사진이 좋은 건지 몰랐어요. 그냥 느낌만으로 골랐죠.”
그는 사진을 더 깊이 이해하려고 철학서와 시집으로 독학을 시작했다. 해 뜨기 전부터 해 질 무렵까지 5분 간격으로 빛을 관찰하며 촬영하는 ‘빛 훈련’을 반복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한 작가의 목련 사진을 본 순간 눈물이 났다.
“그때였어요. ‘이제 보인다’는 확신이 든 건. 그 사진 안에서 감정을 처음 느꼈어요.”
그 감정을 바탕으로 쓴 책이 ‘프로처럼 사진 찍기’다. 이후 그는 철학과 인문학 서적을 독파하며 사진의 폭을 넓혔고 포토에이전시를 창립, 언론사 협업, 강의를 이어가며 전업 사진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조 대표가 사진 철학을 담아 펴낸 ‘프로처럼 사진 찍기’. 그는 이 책에서 ‘마음으로 찍는 사진’의 의미를 강조한다.
조 대표 사진 인생의 전환점이 된 작품. 목련 사진에서 그는 ‘감정’을 처음 느꼈다.
인생 2막: 목공, 삶의 무게를 견디다
“내 사진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상업사진은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가 ‘내 사진’을 지키기 위해 시작한 부업은 나무 간판 제작이었다. 마침 구청에 나무 간판을 납품하는 사업체로 선정되면서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하지만 밀려드는 간판 주문에 집중하느라 사진과 점점 멀어졌고, 전업 사진가가 되겠다는 다짐도 빛이 바랬다.
그러던 중, 우면산 산사태가 발생했다. 사건의 여파로 기관과의 계약이 중단되면서 사업이 빠르게 기울었다. 결국 그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새 출발을 위해 서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지인이 소개해준 양양의 시골집은 새로운 시작의 공간이 되었다.
물론 연고도, 배경도 없는 곳에서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생계를 위해 막노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진가였고, 사업가였던 내가 이 나이에 이걸 하고 있다니… 자괴감이 계속 밀려왔어요.”
가리비 양식장, 일용직 노동 등 거칠고 고된 삶이 이어졌다. 우울증으로 병원을 찾기도 했지만, 약 대신 믿음에 의지했다.
“약은 내려놨어요. 대신 간절히 믿었죠. 믿고 맡기자. 언젠가 좋은 길이 오겠지.”
인생 3막: 커피, 삶을 볶아내다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그는 지인의 소개로 커피 스승을 만나게 됐다. 마침 조 대표가 커피 사업 계획을 세우고 있던 무렵이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이미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허덕이던 터라 커피를 배우고 싶어도 제대로 배울 기회조차 없었는데, 그의 열정을 눈여겨본 스승은 연고도 없는 양양에서 좋은 조건으로 그를 돕겠다고 제안했고, 그렇게 인생 3막이 열렸다.
“믿기 어려웠어요. 세상에 정말 귀인이 있구나 싶었죠.”
다시 배움이 시작됐다. 이번에는 커피였다. 인생에서 가장 절박한 순간이었고, 그만큼 다시 일어나야겠다는 열망이 강했다. 그는 빠르게 스승의 철학을 배우고 익히며 생두를 직접 수입하고 로스팅도 직접 하게 됐다. 테스트용 커피를 통째로 버릴 만큼 실패도 많았지만, 자신의 철학을 차곡차곡 담아 마침내 ‘조승범 커피 윈드블루’를 열었다.
카페 명 ‘윈드블루’는 양양의 바람, 그리고 그의 마음을 닮아있다. 양양으로의 이주는 그에게 또 하나의 도전이었다. 사실 조 대표는 패러글라이딩과 스턴트카이팅을 즐길 만큼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바람을 피하지 않고 즐기는 도전정신이 인생 3막을 열었다.
“서울을 떠나 여기 왔을 때, 바다와 산이 동시에 보인다는 게 믿기지 않았어요. 여기라면 다시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았죠.”
‘진심’을 볶아내다 … 그의 인생 다음 장은?
이제 그의 목표는 단순한 카페 운영에 머물지 않는다.
“제 원두를 사용하는 소규모 카페들이 생겨나면 좋겠어요.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이 아닌, 진심을 담은 가게들이요.”
그는 로스팅 공장을 세우는 꿈을 키우고 있다. 품질로 승부하는 로스터, 커피 철학을 나누는 스승이 되는 꿈. 돈보다 중요한 것은 ‘맛과 진심’이라는 철학으로 그의 다음 이야기가 볶아지고 있다.
“사진도, 커피도 결국엔 표현이에요. 표현에는 진심이 있어야 해요.”
조승범 대표는 현재 양양의 바람을 주제로 한 사진 전시회를 준비하며 카페 운영도 하고 있다. 그의 인생 다음 장은 어떤 향을 품고 있을까. 그래서 더욱 기대된다.
홍기성 기자 cogshi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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