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헌 시인
‘해 놓은 것도 없이 벌써 일흔이네.’ 요즘 친구들과 모이면 흔히 하는 소리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말은 스스로 하는 위로에 불과하다. 이런 문장들이 대화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우리가 나이 들어간다는 뜻이다.
이제는 비워야 할 때라고 자신에게 속삭이지만, 머리는 이해하는데 마음은 그렇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런 날은 마치 자신이 잉여 인간이 되어간다는 느낌이 들어 쓸쓸해진다.
‘이제 나도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가는가?’라는 자조감에 울적해질 때 그림책 한 권을 만났다. 괜시리 무력해지는 날에는 최아영 작가의 어른을 위한 그림책 ‘나의 쓸모’를 다시 펼친다.
그림책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닌 화병이다. 화병은 세련된 가게의 얼굴이었다. 화려한 쇼윈도에서 세련된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치장하고 우아한 자태를 뽐낸다. 그런데 그 크리스마스 장식이 떨어지면서 화병 입구가 깨진다. 화려한 가게에서 버려져 쓰레기 더미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천덕꾸러기가 된다. 가게 근처의 할머니가 화병을 집으로 가져가 먼지를 씻어 내고 바닥에 구멍을 뚫고 흙을 담더니 볕 잘 드는 베란다에 내놓는다.
화병은 쿰쿰한 흙냄새와 스멀거리는 벌레들과 너저분한 물건들로 가득한 베란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화병을 저희 멋대로 ‘10번’이라고 부르는 다른 화분들 때문에 짜증이 난다. 그러나 다른 화분들도 반짝이던 지난날이 있었다. 파리의 레스토랑에서 지내던 오래된 포도주병, 바닷가 카페에서 노을에 물들던 칵테일 잔, 구수한 옥수수차를 우려내던 주전자, 할머니 집안의 장맛을 살려내던 된장독. 그들 모두 한때는 화려한 시간을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이제는 어디 한 곳이 고장 나거나, 자신의 쓰임을 다하고 버려진 뒤 할머니의 베란다에서 화분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살고 있다. 그들은 본래의 이름 대신 1번, 10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며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던 어느 날 화병에게도 새싹이 돋아난다. 열 번째 화분이 된 화병은 새싹을 위해 뜨거운 햇볕도 견디고, 차가운 물벼락도 견디고, 꿈틀거리는 지렁이도 참아낸다. 밤이면 새싹에게 자장가도 불러주고….
그런 화분의 정성 속에서 새싹은 무럭무럭 자라, 꽃을 피우고, 마침내 열매를 맺는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다른 모습을 보며 화병은 화분으로 사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열한 번째 화분이 찾아온다.
우리가 사는 일은 늘 오르막과 내리막이 존재한다. 또한 뜻대로 되는 일보다 안 되는 일이 더 많다. 그럴 때 우리는 자신의 쓸모없음을 한탄하며 스스로 작아지고 무기력해진다.
더구나 자신이 있던 곳이 높은 곳이었거나 화려한 곳일수록 상실감은 더욱 커진다. 이제 다시는 자신에게 빛나는 시간이 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자꾸 우울해하거나 절망한다.
그리고 어떤 이는 영광의 시간과 빛나는 자리를 잊지 못하고 ‘과거’라는 시간 감옥에 갇혀 추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다른 이를 끌어 내리고, 가짜 뉴스로 음해하고, 무리를 지어 정의라는 이름으로 불법을 저지른다.
사람은 누구나, 어디서든, 각자에게 해야 할 일이 주어진다. 그 역할이 빛나는 일이든, 가치가 없어 보이는 일이든. 그러나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상에 가치 없는 일은 없다. 단지 해야 할 일이 달라지는 것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인생이라는 도로 위를 달리는 빛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뒤표지에 있는 한 문장이 오래오래 문과 마음을 끌어당기고 있다.
‘당신의 쓸모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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