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색분교 아이들과 함께한 사진반 수업 모습. 아이들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만이라도 소중한 추억을 간직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봄이 오는 것을 동장군이 시샘이라도 하듯 흰 눈이 흩뿌리던 날, 설악산 오색약수터 문화해설사의 집에 들어선 기자는 밝은 미소로 따뜻하게 맞이하는 홍창해(66) 작가와 마주했다. 산 공기를 닮은 청량한 목소리로 긍정 에너지를 전하는 모습을 보며 ‘지금 이 순간을 모두에게 전하고 싶다’는 기록자의 사명감이 녹아들었다.
치열하게 써 내려간 40년치 일기, 홍창해 작가의 기록은 곧 역사가 됐다.
“오색이 나를 키웠다”
설악산 오색약수터 길을 따라오르면 만나게 되는 성국사는 사찰 후원에 다섯 가지 색의 꽃이 피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색석사라고 부르는데, 오색마을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했다.
기자가 원래 이곳 토박이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저으며 “원래 대구 사람이다”라고 답했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정부의 개혁으로 공직을 잃었고, 이후 양양으로 이주해 평소에 자주 찾았던 설악산 오색약수터 옆에 자리 잡게 되었다. 마을 아이로 자라며 이곳을 떠난 적이 없던 그는 속초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고 군 복무를 마친 뒤 결혼하면서 다시 오색으로 돌아왔다.
홍창해 씨는 왜 다른 지역으로 가지 않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망설임 없이 “오색이 나를 키웠어요. 그래서 남은 거예요”라고 답했다.
그가 이곳에 남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포수 생활과 만물상 운영으로 생계를 이어가다가, 어느 날 이곳을 취재하러 온 기자에게 카메라를 구매하게 됐다. “아마 그 기자는 황당했을 거예요. 자신의 취재용 카메라를 팔라고 했으니 말이에요.” 아버지는 가산을 팔아 카메라 한 대를 장만한 뒤 오색을 찾는 신혼부부와 가족들의 사진을 촬영하거나 마을의 대소사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아버지의 뒤를 따라 걷고 있더라고요.” 아버지가 60대에 세상을 떠난 뒤 홍창해 씨는 아버지가 남긴 기록을 이어받아 ‘오색이 나를 키웠으니, 나도 오색에 보답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오색마을 사진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2024년 《주전골 이야기》에 노부부의 리마인드 웨딩 사진을 담아 소중한 추억을 기록했다.
어르신들 리마인드 웨딩 촬영
홍창해 씨는 기록을 무척 좋아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치열하게 일기를 썼죠.” 그는 중학교 때부터 기록을 시작했다. 거창한 일기는 아니었지만, 하루에 있었던 일이나 느낀 점을 간단히 적어 두었고, 그렇게 40여 년 동안 일기를 써왔다. “기록을 계속하다 보니 역사가 됐어요. 심지어 군대에서도 불을 끄고 취침해야 하는데도 빼먹지 않고 기록했어요.” 다만, 당시에는 변변한 종이가 없어 일부 기록이 유실된 것이 가장 아쉽다고 했다.
일기에서 시작한 기록이 점차 사진 기록으로 발전하면서 주전골의 구수한 이야기를 담은 주전골 마을신문을 5년간 펴내 사람들에게 주전골을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2000년대부터는 양양군사진협회에서 10년 동안 활동하기도 했다. 특히 그의 기록 중에는 수해 현장을 담은 사진도 있었는데, 마을 주민들이 수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어 큰 도움을 주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기록하면 홍창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는 이 말을 떠올리며 미소 짓고는, 한 노부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마을을 기록하는데 특히 사람을 촬영해요. 풍경은 순간의 울림이지만, 인물은 시간이 지나도 울림이 있거든요. 어느 날, 농사짓는 노부부의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아서 리마인드 웨딩 촬영 이벤트를 열었어요. 겨우 웃는 두 분의 모습을 남길 수 있었죠.” 사진 찍는 것을 싫어하던 노부부와 친분을 쌓으며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찍은 한 장의 사진, 그러나 촬영 후 3개월 만에 노부부가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에서 자녀들은 부모님이 함께 찍은 사진이 그 한 장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감사 인사를 전하며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 감동을 원천으로 사진 작업을 꾸준히 이어간 그는 ‘십 리 안에서만 찍는다’는 신조로 오색마을의 다양한 모습을 담아냈고, 덕분에 사진 전시회 <오색약수>, <오색 아이들 작은 이야기>, <말곡 이야기> 등을 열었다. 또한, 어르신들의 리마인드 웨딩 촬영을 매년 진행하며 <주전골 이야기>를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한곳에서 촬영하면 같은 장면이 반복돼 질리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기록할 때 저는 한 가지 목표를 생각해요. 이것은 역사다. 기록을 남기면 누군가는 이를 보고 우리의 모습을 알 수 있잖아요. 3대가 오색을 기록하면 좋겠어요.” 실제로 그의 자녀들도 기록을 남기는 것을 좋아해서 그의 길을 따라가고 있다. 홍창해 씨는 “삼대가 오색마을을 기록한 사진전을 이곳에서 여는 것이 목표”라며 굳은 결심을 내비쳤다.
홍창해 작가의 ‘만물상슈퍼’ 앞에서 찍은 프로필 사진.
청년들 양양 정착하도록 지원
그는 새로운 목표 하나를 더 설정했다. 자신처럼 이곳에 정착하는 사람들이 양양을 사랑하고 오래 머물도록 돕겠다는 선한 영향력의 다짐이다. 계기를 묻자, 이장을 맡으며 귀촌하는 청년들을 맞이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한번은 청년들과 어울리며 대화를 나누었고, 그들의 신선한 마인드가 홍 씨의 마음에 와닿았다. 이후 청년들을 만나면 반가웠고, 대화하는 것이 매우 즐거웠다고 한다.
어느 날, 양양군에서 열린 다양한 모임에 참석한 그는 30대 청년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때부터 청년들이 양양에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유치하며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이곳에 남을 수 있도록 만드는 원천이라고 생각했다. 모임 이후, 홍 씨가 주최하는 리마인드 웨딩 촬영이나 마을에서 열리는 다양한 이벤트에 청년들이 참여하면서 더욱 완성도 높은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곳에 정착하는 사람들이 저처럼 지역을 사랑하고, 오래 머물도록 만들고 싶어요.” 그는 자신이 오래전 오색을 사랑해서 머물게 된 것처럼 앞으로 청년들과 함께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양양을 더욱 따뜻한 공간으로 만들어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의 첫 시작은 오색을 향한 사랑이었다. 하지만 점차 그 사랑이 확장되며, 그는 양양을 더욱 따뜻하고 매력적인 공간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홍기성 기자 cogshi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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