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저녁. ‘밥 먹자’라는 한 친구의 갑작스런 전화에 다섯 명의 친구가 먹거리촌 식당에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다소 이른 시간이었지만, 그 넓은 식당에 달랑 우리 팀 다섯뿐이었다.
반주로 몇 잔 들어가자, 말문이 트인 친구들은 동창 이야기에서 속초의 최근 화제가 된 일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늘어놓기 시작했고, 결국은 정치 이야기까지 넘어갔다.
이야기가 무르익어 가는 분위기를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묘한 일이다. 다섯이 모였는데, 둘은 빨간색이고 둘은 파란색이다. 필자는 투명한지라,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 옆에 서면 그들과 비슷한 색을 가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문득 지난달에 읽은 ‘지모 아바디아’의 그림책 ‘색깔 전쟁’의 내용이 떠올랐다.
한쪽은 빨간색, 다른 한쪽은 초록색뿐인 두 마을. 좋아하는 색깔은 달랐지만 두 마을은 평화로웠다. 그런데 두 마을의 청년이 우연히 길에서 만나 말다툼을 하게 된다.
“몽땅 초록색이어야 해!”라고 소리치자 “모조리 빨간색이어야 해!”라고 받아친다. 마을로 돌아간 두 청년은 서로 거짓말을 한다. 나무와 집을 마구 먹어 치우는 무시무시한 빨강 괴물과 아이들을 잡아가고 들판을 불태우는 끔찍한 초록 거인 이야기가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진실로 받아들였고, 안전을 지키려고 자유를 포기하고 두 청년을 마을의 지도자로 뽑는다. 두 지도자는 각자 ‘빨강’과 ‘파랑’만을 외치며 담을 쌓고, 감시탑을 세우고 결국 전쟁을 일으킨다.
전쟁의 결과는 늘 사람들이 죽고 떠나고, 그들이 사는 세상을 폐허로 만드는 일로 끝난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우리는 희망을 찾고 내일을 향해 작은 걸음을 다시 떼어 놓는다.
그림책 속의 이야기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을 지극히 단순하게 보여준다. 생각이 다른 사람과의 만남, 그리고 일어나는 사소한 다툼이 서로를 미워하는 적으로 만든다. 나의 주장을 정당화하고, 상대방의 주장을 누르기 위해 가짜뉴스를 퍼트려 사람들을 선동한다. 그리고 그 대가로 차지한 자리를 지키기 위해 계속 혐오를 부추긴다. 그리고 마침내 전쟁의 불씨가 활활 타오른다. 그 피해의 몫은 늘 힘없는 국민의 차지다.
먹거리촌에서 집까지 그리 멀지 않은 길이라 친구들과 헤어져 천천히 걸었다. 토요일 저녁 7시 무렵이라 식당가에 사람들이 넘쳐나야 하는데 골목길에 사람들이 없다. 의식적으로 불 켜진 식당 안을 유심히 살피며 걸었다. 16개의 가게를 지나오는데, 손님이 하나도 없이 불만 켜진 가게가 2곳, 한 팀만 앉아 있는 가게가 8곳, 두 팀이 앉아 있는 가게가 3곳, 왁자지껄 손님이 붐비는 곳이 2곳, 불 꺼진 간판 아래 ‘임대’ 현수막이 펄럭이는 곳이 한 군데가 있었다.
총알이 빗발치고, 포탄이 떨어지고, 자폭 드론이 하늘을 날아다녀야만 전쟁터가 아니다.
바로 이곳이 우리의 전쟁터다. 오늘 저녁 장사를 위해 들린 마트에서 집은 한 단의 배추가 어제보다 더 내 지갑을 가볍게 만들고, 그렇게 어렵게 만들어 놓은 생절이가 손님상에 오르지 못하고 익어가는 저녁. 카운터에 쌓인 각종 고지서와 부가가치세 신고서를 열어볼 엄두조차 못 내는 지금, 이곳이 우리에게는 전쟁터이자 지옥이다.
그런데도 저 위에서는 아직 한창 ‘색깔 전쟁’ 중이다. 솔직히 이젠 신물 난다. 어떤 색깔이 집권당이 되든, 누가 대통령이 되든, 제발 여기 아래 좀 내려다볼 줄 아는 지도자가 나왔으면 좋겠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색깔이 만들어낸 미로에 갇혀 허부적대는 국민들도 그렇고, 새로운 색깔로 만든 깃발을 든 사람도 보이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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