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헌 시인
을사년 새해를 맞이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월이다. 시내에는 눈이 없는데 설악산과 울산바위는 눈옷을 두텁게 입고 있다. 오늘이 절기로는 입춘인데 한파주의보를 알리는 문자가 계속 들어오고 있다. 마음은 봄인데 몸은 아직 겨울이다. 아니 마음도 몸도 아직 겨울이다.
2025년 을사년은 필자에게 의미가 있는 해이다. 드디어 만 일흔 살의 문턱을 넘었기 때문이다.
지난 1월 초 일정이 없는 하루, 날을 잡아 2024년 묵은 다이어리를 정리하고 옮겨 적어야 할 사항을 2025년 새 다이어리에 기록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지난 70년을 요약해보자. 아이들과 생활한 교직 40년, 시를 쓰는 시인으로 30년, 문화 예술 기획자 역할을 한 지 20년, ‘어린이책 읽는 어른 모임’을 만들어 그림책 공부를 한 지 20년, <설악신문>에 칼럼을 쓰기 시작한 지 10년, 퇴직하고 문화재단과 문화도시 사업을 쫓아다닌 시간이 7년. 허투루 살지는 않은 것 같다.
이제 숙제는 앞으로 살아가야 할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의 문제다. 그러다 만난 시 한 편이 허영자 시인의 ‘할미꽃’이다.
할미꽃·터득/ 허영자
아 / 이렇게 사는 수도/ 있었구나 //
잇몸으로 / 먹고// 잇몸으로/ 웃는.//
그래! 나도 이제는 ‘잇몸’으로 사는 나이가 됐다는 깨달음에서 답이 절로 나왔다. 잇몸으로 살 나이에 과식은 금기사항이다. 하나, 둘~ 이제는 내려놓자. 자리 욕심도 버리고, 일 욕심도 줄이고, 사람에 대한 욕심도 가볍게 내려놓자. 그저 좋아하는 책이나 보면서 살자. 그렇게 새해 다짐을 했다.
옆집 할머니/ 정진상
‘ㄱ’자도 모르시는 까막눈 할머니는/ 깜깜한 한밤중을 더듬더듬 헤매면서/ 한평생 못 배운 한을 등에 지고 가시네.//
두 눈을 떴는데도 볼 수 없는 눈뜬장님/ 가슴 친 지난 세월 속 눈물 흘리면서/ 기어코 터득한 글자, 허리로 쓴 기역자.//
칼럼을 쓰기 시작하면서 시를 읽다가 마음에 드는 시를 글감으로 저장해두는 습관이 생겼다. 그 글감 파일에 ‘할미꽃’과 같이 엮어있는 시가 정진상 시조 시인의 ‘옆집 할머니’다.
어두운 시절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난 많은 할머니들 가운데 배우지 못해 까막눈으로 답답하게 평생을 사신 분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 할머니들은 평생 허리 굽혀 누구는 밭을 일구고, 누구는 바다 물질을 해가며 식구들 뒷바라지를 하시며 살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글자 하나를 완성 시켰다. ‘허리로 쓴 기역자’
교육은 배우고 익히는 ‘학습’ 과정과 몸으로 익히는 ‘습득’의 과정으로 완성된다. 옆집 할머니의 ‘기역자’는 존경받아야 할 ‘습득’의 결과물이다. 필자는 살아온 시간의 대부분을 ‘학습’과 ‘습득’의 길에 서 있었다. 그런 필자가 다른 이에게 보여줄 글자는 무엇일까? 선뜻 떠오르는 글자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남은 시간에 해결해야 할 숙제가 하나 더 생겼다.
필자가 다른 이에게 마음으로 보여 줄 글자는 무엇인지를 열심히 찾아내어 몸으로 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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