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내가 살던 집 앞마당 한 켠에는 투박하게 시멘트로 만들어진 수돗가가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다른 집에는 없던 수동식 펌프가 하나 있었다. 이 펌프는 평소에는 잘 사용되지 않았기에 녹이 슬어 있었지만, 종종 단수가 되어 수돗물 공급이 어려워질 때에는 우리 집 주위 동네 사람들의 물 공급원이 되어 요긴하게 쓰이곤 했다.
동네 사람들은 단수가 될 때마다 양동이, 큰 대야 등을 들고 와서 펌프에서 길어지는 물을 받아가곤 했었다. 자주 사용되지 않았기에 펌프를 다시 쓰고자 할 때에는 어른들이 물 한 바가지 정도를 펌프에 들이 붓고 펌프질을 시작했었다. 어릴 때라 이 광경이 마냥 신기했었지만 한참 나중에야 이렇게 쓰이는 물의 용어가 ‘마중물’임을 알게 되었다.
멀리 다녀오는 사람들을 맞이할 때 마중 나간다고 하지 않던가. 밤늦은 시간 귀가가 늦어지는 자녀를 걱정하면서 마을 어귀까지 나가는 것도 마중. 이 말이 얼마나 정겨운 말인지. 그래서인지 ‘마중물’이라는 이름은 빗물, 바닷물, 개울물 등등 ‘~물’로 이름 지어지는 숱한 말들 중에서 가장 예쁜 말이라고 느껴진다.
‘~물’로 이름 지어진 것들 중에는 ‘고인 물’도 있다. 대부분의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기에 고인 물은 부정적인 의미로 흔히 씌어 진다. 물이 흐르지 못하고 고이게 되면 당연하게도 부패하게 되고 다방면에서 악취를 풍기며 곳곳에서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하지만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 12월에는 고인 물의 긍정적인 한 면을 보게 된다.
한 해 동안 바닥이 다 드러나도록 그저 퍼내 쓰기만 한 시간들이 아니었나 하는 자책감이 든다. 지식도 열정도 어느 정도 고일 틈도 없이 마냥 퍼내 쓰기만 급급했던 한 해가 아니었는지. 차분하게 능력이나 사유의 깊이가 고이고 숙성될 시간도 필요했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번아웃이 올 정도로 지치고 반복적으로 쓰기만 한 삶에는 물이 고이듯 능력을 채우고 건강을 채우고 웃음을 채우는 시간들이, 그리고 고일 시간들이 필요한 것 아닐까 싶다. 하지만 하늘에서 내리는 비든 다른 어떤 경로이든 외부로부터 공급되어 고이는 물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일찍이 세종대왕께서는 스스로 솟아나는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마르지 않음을 역설하셨나 보다.
한 해를 마무리 하는 이 즈음에 뜬금없는 계엄과 연이은 탄핵 국면으로 온 나라가 온통 들썩이고 있다. 너무 황당하기도 하고 분노의 감정에 휩싸이게 되면서도 이번 계엄과 탄핵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상황 속에서 보게 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된다.
평소에는 서로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남이 잘되면 배 아파하고 아웅다웅 서로 다투고 하다가도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게 되면 똘똘 뭉쳐 이겨내고 어떤 어려움도 극복해 내는 우리나라 민중들의 모습은 마치 결코 마르지 않는 샘이 깊은 물 같다.
과거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일제 강점기부터 가장 최근의 IMF 외환위기와 코로나 위기까지 우리나라 민중들은 늘 샘이 깊은 물이었다. 그래서 한 줌도 안 되는 위정자들이나 기회주의자들 같은 흙탕물이나 구정물들을 모두 희석시켜 버리고 결국에는 맑은 한줄기 물로 도도히 흐르는….
그 중에서도 한겨울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탄핵관련 시위현장에 모여 있는 사람들, 그들을 위해 음료를 선결제해주고 핫팩을 나누어주는 사람들은 우리 사회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마중물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12월, 온통 퍼 쓰기만 했지 조금도 채우지 못했던 한해였음을 반성하면서, 우리들의 삶이 다시 평온해지고 또다시 일상에서의 소소한 다툼과 화해로 서로서로 어우러지는 시간들이 어서 오기를 기원하게 된다.
전형배 데일리F&C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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