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나 얘기는 누구에겐가 한 번 말한 적이 있는 것 같긴 한데, 하여튼 이놈의 촌동네에는 비밀이란 게 없다. 안주인이 말했다.
“왜, 이젠 순옥이 대신 그 여자한테 꽂히셨나?”
얼굴은 웃지만 눈은 무슨 배신자라도 보는 양 쎄했다. 참, 자기가 뭐라고 이걸 트집을 잡나?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 모습에 내뱃속 꼬였던 벨이 슬그머니 풀리는 것 같았다. 나는 능글능글 약을 올려주었다.
“네, 오늘도 그 아가씨 얼굴 보러 사우나 다녀오는 길입니다. 누구처럼 비쩍 마르지도 않고 오동통해서 아주 딱 내 스타일이거든요.”
근질거릴 게 뻔한 그 입으로 순옥이한테도 똑똑히 들려주라고 아주 큰 소리로 대꾸한 것이다. 그말을 하고 나니 속이 왜 이리 시원한가! 나는 테이블 위에 있던 신문을 딱 펼쳐들어서 파닥파닥 넘기며 더 신경을 건드려주었다. 내말이 매운 지게작대기가 되어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사월초파일, 나는 아카시아 꽃이 흩날리는 산길을 걸어 무량사에 올라갔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올해도 어머니 대신 시주돈을 전하러 나선 길이었지만 이번엔 어머니가 시키지 않아도 절에 꼭 다녀오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작년에 빌었던 것이 신통하게도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하우스 필름을 아주 비싼 걸 설치해놔서 그게 비바람에 찢어지는 일이 없도록 해주십사 빌었는데, 지난 여름 태풍에 남들 하우슨 날아가도 우리 건 멀쩡했다. 까치 놈이 벌레 쪼느라 천정에 구멍을 좀 낸 것을 빼면 우리 하우슨 지금도 새것이나 다름없었다.
‘올가을 오백 평을 빌려 작물을 늘굽니다...’
나는 절탑 앞에서 합장을 하고 새 하우스에서 작물이 병없이 크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번에 빌리는 땅에서 농사가 잘된다면 내후년쯤에는 그동안 모은 돈을 합해서 아예 내 땅을 사고, 그런 뒤엔 그 땅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하우스를 더 늘릴 계획이었다.
요즘엔 농사꾼이라도 재배 작물을 잘 고르고 규모를 크게 하면 부자 소리도 듣고 사장님 소리도 듣는다. 새로 빌리는 오백 평에서 계산만큼만 소출이 착착 나와서 해마다 면적을 늘려나간다면 나라고 그런 기업영농인이 되지 못하리란 법이 없다.
그리고 내가 고소득자로 새농민상 같은 거 하나 떡 받아쥐고 신문에라도 나면 사우나 아가씨 같은 여자도 날 그냥 흘려보지는 않을 테고, 딸 가진 부모들이 내 이름을 얘기해도 주눅드는 일은 없을 것이다.
“뭘 그렇게 열심히 비시나?”
합장을 풀자마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순옥이가 팔짱을 끼고 샐샐 웃고 있었다. 멋쩍게시리 왜 남 꽁무니에서 기도하는 걸 보고 섰는가? 요 계집애가, 하고 을러주려다가 그래봐야 깔깔대기나 할 것 같아서 나는 점잖게 대답했다.
“너 홍천으루 시집가서 잘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순옥이는 역시나 믿지 않았다.
“거짓말두 잘 한다.”
“나이 먹어서 하는 결혼인데, 잘 살아야 될 거 아니야.”
그러나 내가 그렇게 말하자 순옥인 입에서 샐쭉임을 걷어내고 눈을 깜박거렸다. 사실 요 계집애가 연애를 시작한 뒤로 잘되라고 바란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말해놓고 나니 나도 꼭 진심을 얘기한 것처럼 가슴이 선선해졌다.
“그럼, 나도 너 좋은 색시 만나게 해달라고 빌어주지 뭐.”
순옥이의 말에 나는 그래 고맙다, 건성으로 대꾸하고 절마당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흘끗 돌아보니 순옥이가 절탑 앞에서 합장을 하고 저렇게 진중할 때가 있었나 싶게 입술을 달싹거리며 치성을 드리고 있었다.
정말 날 위해 빌어주는 것인가?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아카시아 꽃이 널린 하얀 절길을 되돌아 내려올 때는 나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고 쓸쓸해졌다.
그러나 밤나무에서 은행 안 열린다더니 그럼 그렇지, 요 계집애가 날 위해서 뭘 빌어줄 리가 없었다. 오히려 나 말라죽으라고 눌림굿이나 벌이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내가 식당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오후 망중한을 즐기고 때였다. 순옥이가 차에서 내려 저쪽에서 오면서부터 말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사우나에 왜 안 가구?”
그 말까지는 그런가보다 했다. 그런데 요게 딴 날하곤 달리 다른 데가 아닌 바로 나한테로 똑바로 걸어와서는 맞은편에 착 앉아 생글생글 웃는데, 무언가 영 마뜩잖았다.
“사우나 아가씨한테 너 얘기 했더니 알더라”
고게 대뜸 말하는데 난 심장이 꿈쩍했다.
“뭘 알아?”
“그 체크무늬 남방 아저씨, 하고 금방 알더라. 너 맨날 그옷만 입고 다닌다며?”
말문이 턱 막혔다. 못 볼 걸 훔쳐보다가 뒷덜미를 잡힌 것마냥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맨날 그 그옷만 입고 다녔다는 건 또 뭔가? 분명 다른 옷도 입었는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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