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삶‘의 타이틀 이미지. 이정희 작가 부부와 재규의 캐릭터가 그려졌다.
황혼기의 전유물이었던 ‘쉼’의 개념들이 MZ세대, 파이어족들의 부상과 맞물려 세대 모두를 아우르는 키워드로 급부상하고 있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현실에 치여 ‘귀촌’을 생각해보기 마련이다.
힐링, 호캉스, 캠핑, 귀촌 등 ‘쉼’의 키워드가 떠오르는 요즘, 고성군에 귀촌해 만화로 고성의 소소한 일상을 그려오고 있는 이정희 작가를 만나 ‘고성 삶’과 귀촌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오롯이 ‘나의 일’ 갖기 위한 선택
서울에서 애니메이터, 캐릭터 콘텐츠 기획 디자이너로 9년을 일해온 이정희 작가는 지난 2016년 남편과 함께 고성군에 귀촌해 천진에 정착한 후 1인 업체 ‘세컨더리액션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고성에서의 일상을 담은 만화 ‘고성 삶’을 그려오고 있다.
“3년 정도 진행했던 프로젝트가 종료되면서 이직과 새로운 시작을 놓고 고민하다가 서울 집 전세 계약이 끝나고 남편도 서울살이와 회사에 대한 회의감으로 퇴사를 하고 방황하던 시기여서 새로운 시작을 하려던 차에 일단 귀촌하게 되었습니다.”
9년간의 경력을 뒤로하고 오롯이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 귀촌을 택한 이 작가의 시작은 생각보다 순조롭지 않았다.
첫 귀촌은 경기도 가평 친정집에서 농산물을 판매하는 일을 하며 시작했지만, 병충해로 그해 농사가 잘되지 않았고, 갑작스러운 합가도 순탄치 않아 다시 이주를 하게 됐다.
이 작가는 예전 외가댁이 있던 속초에 놀러 와 인근 고성 아야진과 화진포에서 보냈던 좋은 기억을 되살려 회사 생활로 고민하던 남편과 고성에서 캠핑을 하게 됐고, 이때 고성군을 다음 귀촌지로 정하게 됐다고 한다.
“소나무 숲과 갈대숲이 어우러진 크고 고요한 화진포, 그 위로 비치는 산과 하늘의 고즈넉한 모습, 밤이 되면 유난히 잘 보이던 별, 가까이 들리는 파도 소리, 아침에 뜨던 붉은 해와 오렌지색으로 물드는 바다와 하늘, 끼룩끼룩 갈매기들까지 완벽하게 아름다워서 나중에 더 나이를 먹으면 이곳에서 살고 싶다고 얘기했던 곳이었습니다.”
부부는 고성 이주 후 9개월간 가진에서 지내다 지금의 천진으로 정착했고, 서핑 1세대인 남편 허석환 씨의 오랜 꿈이었던 서핑 샵 ‘블랭크스 서프’를 열게 됐다.
서핑샵 ‘블랭크스 서프’ 앞에 앉은 이정희 작가와 남편 허석환 씨.
귀촌생활, 일기처럼 그리기 시작
부부가 서핑 샵을 차리게 된 기쁨도 잠시, 준비기간과 홍보 부족으로 그다음 해까지 가게 수입은 제로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서핑에 취미가 없던 이 작가는 가게를 운영하며 방황과 고민이 더 깊어지기 시작했다.
“현업에서 물러나다 보니, 그림 외주 일도 줄어들고, 가게 수입도 거의 없어서 개인 작업물을 늘려 다시 외주가 됐든 그림을 팔든 빨리 생계를 꾸려나가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서핑도 하지 않는 내게 이 서핑 샵 일이 무슨 의미인가 회한이 들면서, 나는 나의 길을 찾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이 작가는 자신의 삶을 꾸려가기 위해 다시 펜을 잡고 뭐든 그려보기로 결심했다. 현업에서 손을 놓은 후 다시 막막한 창작의 시작점에서 신음하던 중 그는 짖누르던 부담을 내려놓고, 일기처럼 그릴 수 있는 귀촌 생활만화 ‘고성 삶’을 그리기 시작했다.
“‘고성 삶’은 작은 서핑 샵에서 n잡으로 먹고사는 저 ‘원추’(주성치의 영화 ‘쿵후 허슬’에 나오는 ‘돼지촌의 여주인’처럼 되고 싶어서 따온 이름)와 남편 ‘오맹달’(홍콩배우 ‘오맹달’과 비슷하게 생겨서 따온 이름) 그리고 고양이 ‘재규’(지난해에 고양이별로 떠나서 하차한 반려묘) 등 주인공 3인조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10컷 내외로 기록하는 생활 만화입니다.”
‘고성 삶’은 작가의 귀촌 사연, 고성의 투박하고 정 많은 어르신들, 고성에서 겪은 이야기들을 담아내며 점차 인기를 얻게 됐고, 다음 포털에 노출돼 서핑 샵 방문객들의 인터넷 게시글 등으로 하루 500명 정도의 독자가 생겨날 정도로 인기가 높다는 평이다.
고성 어르신의 투박함과 정을 그린 에피소드의 한 컷.
“더 좋은 작품으로 보답할게요”
이 작가는 ‘고성 삶’을 시작으로 ‘2019년 고성군 청년창업 지원 사업’을 통해 디자인, 일러스트, 애니메이션 작업을 의뢰받는 1인 업체 ‘세컨더리액션 스튜디오’(이하 2AS)를 열게 됐다. 작가가 그토록 바라던 ‘자신의 일’을 시작하기 위한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2AS’는 창업 당시 서울 일러스트 페어에 참여해 경기도 시흥시 대야동 도시재생센터의 마을 콘텐츠 ‘플레이즘’의 리드 필름 제작을 진행하는 등 순조로운 시작을 알렸으며, 이후로도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지원을 받은 ‘고고 탐정단’ 샘플 원고 작업 △속초의 젤라또 가게 ‘라또래요’와 함께 ‘감자래요’라는 감자캐릭터와 메뉴 디자인 △봉포의 숙박업체 ‘삼박한 집’과 함께 관광객들을 위한 동네 맛집을 소개하는 ‘봉포·천진 지도’ 작업 △‘네파 X 론 체어’ 팝업 전시에 참여하는 등 꾸준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AS의 작업과 서핑 샵 운영으로 현재는 ‘고성 삶’의 업로드가 뜸해지게 됐지만, 이 작가는 ‘고성 삶’을 이어 나가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독자님들께 죄송하고, ‘고성 삶’으로 남기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가도 그 감정들이 흐지부지돼서 놓치는 경우가 생겨 안타깝습니다. 집과 작업실, 서핑 샵, 공유 숙박까지 모두 한 장소에서 이뤄지다 보니. 작업시간을 만들기가 어렵지만, 오히려 이런 상황이어야 ‘고성 삶’의 생생한 에피소드들이 생겨날 수 있기 때문에 현재의 시스템 내에서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내려고 노력 중입니다.”
이 작가는 앞으로 디지털뿐만 아니라 손 그림 작업을 늘려 자신만의 시선과 이야기를 다듬어 선보일 예정이며, ‘고성 삶’도 느리지만 계속 쌓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고성 삶’ 작업을 통해 좋아하는 고성에 살면서 저희를 돌봐주시는 좋은 이웃분들과 마주치며 느끼게 되는 감정들, 낯설지만 호감 있는 손님들과의 만남, 놀러온 지인들과의 스치는 대화 등을 그리다 보면 그저 생계를 위해 흘러간다고 여겼던 시간들이 사실은 의미 있는 인연들이었고, 그 속에서 작고 귀여운 행복으로 채워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이정희 작가는 ’고성 삶‘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다시금 되돌아보며, 독자들에게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정희 작가의 ’고성 삶‘은 인스타그램(https://www.instagram.com/goseonglife), 브런치(https://brunch.co.kr/@pantaloggi)에 업로드 되고 있으며, 네이버 블로그(https://blog.naver.com/pantaloggi)에서 2AS의 작업물과 부부의 귀촌 일상을 살펴볼 수 있다.
임천식 인턴기자 limcun3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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