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아홉 번째였던 백두 천지 여정은 천신만고 끝에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돌이켜보면 이번 여행은 계획부터 성사까지 극복하기 어려운 난관의 연속이었다. 우선 건강이 문제였다. 2년 전 나는 밭에서 일하다 갑작스러운 가슴 통증으로 쓰러졌다. 심근경색이었다. 다행히 근처에 있던 군인들의 도움으로 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다. 응급수술과 몇 주간의 입원치료로 위급한 상황에선 벗어났지만 지금껏 약을 복용하고 있다. 아내와 아이들은 이런 건강 상태로 백두 천지에 오르기는 무리라며 극구 반대했다. 설득에 설득을 거듭해 절대 무리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가족들의 출국 동의를 받을 수 있었다. 다음은 나이가 걸림돌이었다. 백두산행을 감독하는 장백산 관리위원회에서 올해부터 75세 이상 노령자들의 등반을 허용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예상치 못한 일이라 적이 당황스러웠다. 등반과 출입구 통과 과정에서 몇 번씩 제지를 당했다. 다행히 같이 오르는 사람 중에서 스스로 내 보호자가 되겠다고 서약해 준 고마운 친구가 있어서 가능했다. 여행 다니다 보면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생각도 못했던 호인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여행에 숨겨진 또 다른 묘미다.
열 번째 등반이 가능할까…욕심이 생긴다
겹겹이 고비를 넘어 이뤄낸 기적 같은 아홉 번째 백두 천지 산행을 감사하면서도 벌써부터 머리가 복잡하다. 나이는 더 먹고 기력은 더 쇠할 텐데 열 번째 등반이 가능할까? 걱정이 앞서지만 자꾸만 욕심이 생긴다. 내가 꿈꿔 온 백두 천지 등반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 땅 개마고원 삼지연을 거쳐 신무성으로 해서 병사봉을 넘어 도달한 천지에서 두 손 받들어 떠 올린 천지수를 한 모금 마셔보고 싶다. 병사봉 아래 천지에 이르는 꿈을 여러 차례 꿨지만 깨고 나면 너무나 허망했다. 머릿속에 강렬하게 새겨진 희열만큼이나 그 잔영에 매달린 아쉬움도 컸다. 우리 땅을 밟고 오르는 동파 백두 천지 여정이 내 생애에 이뤄질 수 있을까? 꿈이 있으면 반드시 길이 있음을 되새기는 수밖에.
어느덧 연길로 돌아가는 버스가 출발할 시간이다. 차에 오르니 나를 백두 천지 천문봉에 오를 수 있게 도와준 그 여성이 먼저 와 앉아 있다가 일어서며 반갑게 나를 맞아준다. “라오시엔셩! 꿔라이라! 칭쭈어!(나이 많은 선생님! 돌아오셨군요! 앉으세요! 老先生! 歸來啦! 請坐!)” 하면서 옆자리를 권한다. “닌레이러마?(피곤하시죠? 您累了嗎?)” 하기에 “뿌레이!(피곤하지 않습니다, 不累!)” 답을 하니 “닌더지엔캉헌하오!(어르신 건강하시네요, 您的健康很好!)” 하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나도 “뉘스! 닌빵주워페이창간시에(부인! 나를 도와줘서 감사드립니다, 女士! 您幫助我, 非常感謝!)”라고 사의를 표하니 “메이꽌시 메이꽌시!(별말씀을요. 괜찮습니다, 沒關係, 沒關係!)” 하며 부인이 겸연쩍은 미소를 보낸다. 고령의 이방인에게 베풀어 준 그녀의 호의에 다시금 감사하며 하늘과 백두산으로부터 큰 복록과 행운이 깃들길 빌어 주었다.
백하 외곽을 빠져나오자 버스는 속도를 내서 달린다. 갑작스레 피로가 몰려오면서 폭설처럼 졸음이 쏟아진다. 얼마나 잤을까. 버스가 멈추는가 싶더니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면서 내린다. 화장실을 가는 모양이다. 길가에 간판을 보니 ‘라오터우(老頭)’이다. 늙은이란 뜻이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저런 글자들이 유독 눈에 잘 띈다. 서쪽 하늘을 보니 낮게 깔린 주황색 노을이 짙어지고 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저녁 7시가 넘었다. 버스는 다시 출발하고 옥수수 밭 천지인 들판과 구릉이 활동사진 넘어가듯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한민족의 뿌리이며 원천인 백두 천지
저 멀리 들판 너머로 높은 산봉우리가 아련하게 보이는데 아무래도 용정의 비암산 같다. 그렇다면 앞으로 30~40분이면 연길이다. 버스 안 이곳저곳에서 승객들이 주섬주섬 짐을 챙긴다. 곧 연길 시내 ‘노화거참(老火車站, 옛 기차 정거장)’ 앞에 버스가 멈춰 선다. 종착점이다. 함께 타고 온 사람들이 서로서로 작별인사를 하면서 희미한 가로등 불빛 속으로 사라진다. 나도 옆 자리 부인과 석별의 정을 나눴다. 마침 택시가 서 있기에 잡아타고 연길 인민공원 옆 수상시장으로 갔다. 바로 해란강 식당으로 직행해 냉면 한 그릇을 시켜 먹었다. 양이나 간이 산행 뒤 시장기를 잠재우기에 딱 안성맞춤이었다.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종일 적어놓은 메모지를 정리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오늘의 기억과 느낌을 생생하게 기록해두고 싶었다. “백두 천지님! 감사합니다. 당신이 단군을 잉태 화육시키고 홍익 이념의 국가를 뿌리내리게 한 이곳이 우리 한민족의 뿌리이며 원천입니다. 당신의 정신이 깃든 사랑과 자주, 근면과 성실, 단결과 협동 그리고 용기와 인내 이것이 바로 우리 한민족의 원초적 사상이며 정신입니다. 5천 년 민족사에 점철된 이 맥을 이어받아 오늘날의 우리가 있고 앞으로도 우리 후손들이 영원히 이어갈 것입니다.”
혼돈의 시대를 지나다보면 여명의 별빛처럼, 석양의 태양처럼, 소중히 간직해 온 가치와 정신이 퇴색되거나 잦아드는 위기의 순간을 맞이할 지도 모른다. 그럴 때면 백두 천지를 찾아보자. 그곳에 오르면서 잠시 잃었던 길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삶이 방향을 잃고 위태롭다고 느낀다면 태초의 상서로움이 살아있는 백두 천지를 떠올려보자. 부단히 현재를 살아내는 당신의 존재 이유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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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덕수, 경동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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