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봉 정상을 차지한 사람들이 왁자지껄 분주해진다. 천지 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저마다 인증 샷 찍느라 정신이 없다. 천지와 주변 연봉들을 굽어살피며 감상에 빠져들 공간도 시간도 허락되지 않는다. 할 수 없지. 여의치 않을 때는 벗어나는 게 상책이다. 이리저리 떠밀리다 간신히 한쪽 구석을 파고들었다.
무심결에 올려다본 백두 천지의 풍경은 장관이었다. 그 웅장함에 압도된 나는 그대로 무릎 꿇고 주저앉고 말았다. 하늘도 푸르고 백두 연봉도 푸르고 천지도 푸르다. 앞에 보이는 모든 존재가 푸른 옥색 옷으로 장엄한 파노라마를 연출한다. 그 푸른 기운이 하늘에서 호수로 호수에서 하늘로 이어진다. 온통 푸른 서기로 가득하다. 별안간 머리가 멍해지고 가슴은 마구 요동치고 두 눈에서는 희열의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린다.
“모든 인류와 생명체들의 공생 공영을”
“오! 거룩한 백두 천지님이시어! 우리 한민족을 당신 자손으로 점지하시어 탄생시키시고 화육하신지도 벌써 오천 년이 되었습니다. 때로는 즐겁고 평화롭게, 때로는 모진 풍파와 고난 속에서도 당신의 그 거룩한 홍익(弘益)의 이념을 민족의 신앙이자 국가의 으뜸 목표로 실천해왔습니다. 5천만 한민족 모두가 당신의 아들인 단군의 후손입니다. 단군에게 한반도와 남북 만주, 연해주 일원까지 그 영토로 넘겨주신 이래 무려 오천 년 동안 우리는 정체성을 유지하며 부단히 성장해왔습니다. 세계사에 유례없는 자타 공인 통일 민족국가였습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 넓은 영토 모두 남에게 넘겨주고 한반도에서만, 그마저도 80여 년 전 남북으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당신의 그 고귀한 홍익인간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자유주의, 민주주의니 공산주의, 사회주의니 외래 용어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위대하고 외경스러운 백두 천지님! 당신의 위력과 위엄으로 홍익을 국시로 한 통일 민족국가로 재탄생시켜주십시오.”
통일 민족국가 재건과 홍익이념의 재현을 간절하게 빌고 또 빌었다. 그리고는 지구촌 제 민족들과 국가 간의 반목과 대립을 해소하고 모든 인류와 생명체들이 공생 공영케 해달라고 기도했다. 끝으로 가족들의 평안과 행복, 그리고 개인적인 소망들까지 한참을 기원하고서야 감았던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주변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와 바람 소리가 일순간 나를 현실로 소환했다. 어깻죽지며 허리, 머리까지 부딪혀가며 가까스로 사람들 틈을 빠져나와 도망치듯 아래로 내려왔다. 잠시 바위에 걸터앉아 위를 쳐다보니 천문봉 꼭대기 능선에는 사람들이 양 떼들처럼 이리저리 몰려 움직이며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그럴 법도 하지. 이렇게 날씨 좋은 날에 천지를 배경으로 인증 샷 남기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 저마다 자신들의 행운을 공인받고 싶은 모양이다. 그제야 나도 번뜩 정신이 든다. 매표소부터 정상에 오르기까지 몇 번씩 여권과 비자를 보여 줬는데 번번이 내 나이가 많아 올라갈 수 없다고 등산을 말렸다. 아직 건강하다고 통사정을 해 간신히 이곳까지 올라온 터라 불현듯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혹시 이번이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도 기록을 남겨둬야겠다. 잰 발걸음은 어느새 천문봉 꼭대기로 향한다.
천지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면 인파를 비집고 들어가야 하는데 좀처럼 기회가 나지 않는다. 이를 어쩌나! 별안간 기지가 떠올랐다. 부끄럽지만 이 길밖에 없을 것 같아 용기를 내 이렇게 외쳤다. “따쟈하오(大家好, 여러분 안녕하세요.) 워스빠스쉐이(我是八十歲, 내 나이 80입니다.) 워스라오런아(我是老人呀, 나는 노인입니다.)” 그러자 다들 나를 쳐다봤다. “뚜이부치!(對不起, 미안합니다!)”를 연발하자 슬금슬금 공간을 내준다. 그 사이 곁에 있던 젊은 여성에게 대뜸 핸드폰을 건넸다. “쟈오샹, 파이쟈오피엔!(照相, 拍照片, 사진 좀 찍어주세요!)하니 그 여성이 “시아오얜(笑顔, 웃으세요.)” 하면서 찰칵 찍어준다. “따꾸냥, 시에시에닌(大姑娘, 謝謝您, 아주머니! 감사합니다.)” 친절을 베푼 여성과 배려해 준 주변 사람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하자 모두 박수치며 환호해준다. 중국에는 아직 경로사상이 남아있는 걸까, 아무튼 천만다행이다 싶었다.
“백두산은 길이 보전해야 할 귀한 유산”
안도감에 물병 하나 사 들고 천천히 마시며 주차장에 이르자 하산 차가 기다리고 있다. 구불구불한 좁은 도로를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내려오는데 솔솔 잠이 온다. 저 멀리 숲의 바다는 아물아물 끝없이 펼쳐지고 하늘과 맞닿은 듯 뿌연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참으로 장엄한 광경이다. 저 광대무변의 광활한 숲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생명이 공존공영하면서 조화롭게 화육되고 있겠지. 나도 대자연의 품속에 조용히 안기고 싶다. 만물의 영장이라면서 인간은 왜, 무엇 때문에 대립하고 반목하며 투쟁하는가? 그 살벌한 각축전은 언제 끝날 것인가? 만족을 모르는 끝없는 탐욕이 인간을 파멸로 이끌고 있음을 모르는가? 공존, 공생, 공영, 공향이야말로 마땅히 추구해야 할 목표라면서도 현실에서는 그 반대로, 서로 각축하며 자연의 질서와 섭리를 파괴함은 물론 인간 자신마저 파멸시키고 있지 않은가? 심히 씁쓸하고 한없이 수수롭다. 드디어 차는 장백산 풍경구에 도착하고 사람들은 장백폭포, 소천지, 녹연담 행 버스로 몰려간다. 그들을 따라가는 대신 나는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주변을 살피다 전에 보지 못했던 것에 눈이 갔다. ‘경축! 장백산 세계지질공원’ 대형 아치에도 큰 바위에도 붉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알아봤더니 지난 3월 백두산이 세계지질공원으로 유네스코에서 등재됐다고 한다. 만시지탄이지만 백두산의 가치가 전 세계로부터 인정받게 됐다니 기쁜 일이다. 다만 백두산의 중국 이름인 ‘창바이산(長白山)’으로 등재된 것은 아쉽다. 남북이 힘을 합쳐 ‘백두산(白頭山)’으로 세계 유산에 등재했더라면 민족혼을 드높이고 나아가 분단 극복을 위한 이정표를 만드는 역사적 쾌거가 됐을 것이다.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은 지질학적 가치를 넘어 생태적, 문화적, 종교적 차원에서도 인류의 마지막 남은 보고임에 틀림없다. 80억 인류가 길이 보전하여 후대에게 넘겨줘야 할 귀한 유산이다. <계속>
임덕수, 경동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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